경제 '破國' 아르헨, 추락의 끝은?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국제금융시장에 파장, 정정불안 가속

아르헨티나 산타페주 로사리오의 치과대학생 마틴 빌라루엘(25)씨는 졸업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교수들이 임금체불에 항의, 파업 중이기 때문이다. 시험을 치르고 치과의사로 일하려면 일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는 최근 부모님이 사는 북동부 도시파라나로 되돌아 갔지만 부모님 형편도 여의치 않다. 교사인 어머니는 월 700달러의 임금을 3개월 동안 받지 못했다. 유방암을 앓고 있는 어머니는 의료보험 재정난으로 민간 병원들이 8개월동안이나 의료비를 지원 받지 못하는 바람에 치료가 중단된 상태다. 보건소는 무료지만 재정 부족으로 치료가 신통치 않다.

파라나시가 있는 엔트레리오스주 정부는 3개월 동안 공무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했다. 임금을 받고 있는 유일한 직종은 경찰이다. 약탈에 나선 시민들로부터 정부 기관과 시장을 보호해야하기 때문에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았지만 돈이 없으니 아무 것도 살 수 없다. 이 도시 슈퍼마켓들은 지난 주 폭도로 변한 시민들의 약탈로 텅 비어버렸다.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사정이 나아지리라는 기대하지 않는다”면서 “친구들 대부분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막대한 외채, 인구 3분의 1이 빈민

남미의 농업 대국 아르헨티나가 경제침체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유럽에 곡물과 육류를 수출함으로써 세계적 부국으로 부상했던 이 나라는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 시장이 재편되면서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1976년 집권한 군부가 좌익인사 2만 여명을 살해한 ‘더러운 전쟁’을 벌이면서 민주주의도 짓밟혔다.

89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취임이후 5,000%가 넘던 인플레가 잡히면서 나라가 안정을 찾는 듯 했으나 실은 속 빈 강정이었다.

메넴 정부는 1,14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외채와 400억 달러의 국영기업 매각대금으로 재정적자와 경제난을 가려버린 것이었다. 20세기 초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던 아르헨티나는 지금 37위로 추락했으며, 남미에서도 브라질과 멕시코에 이어 3위에 머무르고 있다.

경기 침체는 국영기업 민영화율이 98%에 이르면서 더 이상 내다팔 공기업이 부족한데다 수출마저 부진해진 4년 전부터 본격화했다. 하루 2,000명 이상이 빈곤선 이하로 떨어져 3,600만 명의 인구중 3분의 1이 빈민으로 분류되고 있다. 지난 2년간 실업률은 14%에서 18.3%로 올라갔다.

12월 19, 20일 이틀동안 산타페와 엔트리리오스, 코르도바, 멘도사 ,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에서 일어난 상점 약탈 등 소요사태는 최소 27명의 사망자와 250여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99년 집권한 페르난도 데라루아 대통령 중도좌파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데라루아 정부 출범이후 9번째로 단행된 초긴축조치로 임금과 연금 등이삭감당한 근로자와 연금 생활자, 빈민층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 계기였다.


부정부패 만연, 예고된 파산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궁핍은 국가경제가 결딴나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 몫 챙기기에 바쁜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개혁에 대한 냉소, 후안 페론 정권 시절부터 선심 정책에 길들여져 온 노동계의 변화 거부 등이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인플레 억제와 재정적자만을 모면하기 위해 장기적인 안목 없이 닥치는 대로 국영기업체를 민영화한 메넴 정권의 실정도 데라루아 정권이 고스란히 떠안은 부담이 됐다.

메넴시절 민영화사업으로 들여온 400억 달러의 외자 가운데 절반 가량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난해와 올해 경제위기를 틈타 국내은행에서 해외로 빼돌린 내국인 예금이 200억 달러에 이른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데라루아 정부는 경제 회생을 위해 올해 초 초법적 특별 권한을 의회로부터 부여 받아 강도 높은 개혁작업에 나섰으나 ‘민중 저항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특히 외채상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근로자와 연금생활자의 월급과 연금 13% 삭감, 은행예금 부분 지급동결, 민간연금기금을 활용한 정부채권 강매 등이 결정타가 되면서 소요사태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의 직접적인 이유는 상환능력을 훨씬 넘는 외채 이자 부담과 페소화와 달러화의 환율을 1대 1로 고정시켜둔 환율제도에 있다는 분석이다. 이 나라의 외채는 1,32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46%로 유로화 지역 국가들에 대한 GDP대비 채무 한도 60%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스위스 제네바 국제대학의 샤를 비플로스 교수는 “아르헨티나의 채무는 그다지 과도하지 않은 적당한 규모이며, 문제는 이를 상환할 능력이 있느냐 여부다”라고 지적했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의 폴 크루그먼교수는 91년 도밍고 카발로 경제장관의 주도 아래 인플레를 잡기 위해 페소화와 달러화의 환율을 1대1로 고정한 환율제도가 “아르헨티나를 달러화의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비판했다.

당시에는 이 고정환율이 연간 5,000%에 육박하던 인플레를 잡고 국가 재정을 만성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게 하는등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됐으나 지금은 기업의 대외경쟁력을 약화시켜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됐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책임론도 거론되고 있다. IMF는 긴급부채 상환을 위해 216억달러 규모의 자금지원 계획에 합의했으나 이 달 초 아르헨티나 정부가 ‘재정 적자 제로(0)’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초 지원키로 했던 12억6,400만 달러의 지원을 보류,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페소화 평가절하 ‘극약처방’

아르헨티나는 이제 외채지불유예(모라토리엄)선언과 긴축정책, 페소화의 평가절하로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수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외채 1,320억달러의 원리금 상환을 3년 정도 유예하는 것은 불가피한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또 지난 10월 총선에서 승리, 데라루아를 퇴진시키는데 성공해 집권당이 된 페론당은 미 달러화 표시 국내신용과 예금을 페소화로전환하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하며, 폐소화를 50~60%까지 평가 절하하는 긴급 경제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데라루아 정부는 일단 고정환율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방침이지만 평가절하의 압력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페소화 평가 절하는 아르헨티나에 투자한 외국기업들의 엄청난 손실과 은행의 연쇄도산 등 심각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은행 잔고는 평가 절하되고 기업 활동이 위축돼 실업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해 서민들의 삶은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없어보인다.

남경욱 국제부기자

입력시간 2001/12/28 15:47


남경욱 국제부 kwna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