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도 "새해가 신경쓰이네"

삼성전자 소액주주, 부당 내부거래 손배소송서 900억 배상

경영상의 잘못으로 손해를 입었다며 소액주주들이 삼성전자 전ㆍ현직 이사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법원이 900여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 재계에 비상이 걸렸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를 상대로 주주 대표소송을 낸 소액주주들의 손을 법원이 들어준 것은 재벌 기업의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와 ‘거수기식’ 이사회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법원은 또 건실한 기업의 이사진이라도 재벌 오너의 입장만 대변해 회사에 손해를 입혔을 경우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이날 900여억원이라는 거액의 배상판결과 함께 이례적으로 가집행 판결까지 내린데서도 잘 드러난다.

재판부는 선고 직후 “재벌의 부당 내부거래는 공정 경쟁을 막아 자본주의 발전의 암적 존재였다”며 “내부거래 관행으로 그룹 전체에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계열사 이사들은 주주들의 권익을 위해 계열사의 이익만 추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치자금 제공한 이회장은 75억원 배상”

수원지법 민사7부(재판장김창석부장판사)는 12월 27일 박원순(45ㆍ참여연대 사무처장)씨 등 삼성전자 소액주주 22명이 주주대표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김모 이사 등 삼성전자㈜ 전ㆍ현직 이사 11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선고공판에서 “김씨 등 이사 10명은 연대해 모두 902억8,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회장은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상책임에서 제외됐다. 재판부는 그러나 75억원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뇌물로 공여한 이 회장도 75억원을 주주들에게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삼성전자가 인수에 따른 위험성의 정도가 높은 이천전기㈜를 충분한 검토 없이 이사회에서 1시간만에 인수를 결정, 2년도 경과하지 않아 이천전기가 퇴출기업으로 선정, 청산됐다"며 "인수 결정에 따른 손해액 276억2,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삼성전자가 액면가 1만원에 취득한 삼성종합화학㈜ 주식 2,000만주를 1주당 2,600원에 처분했지만 순자산가치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1주당 주가가 5,733원에 이르고 있었다"며 "이사들이 의무를 위반, 법인에게 이익이 되는 처분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1시간만의 토론으로 처분을 결정했으므로 차액인 626억6,000만원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 회장의 뇌물제공에 대해 "기업활동을 하며 법질서에서 벗어나 결과적으로 회사에 이익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할지라도 뇌물공여와 같은 형법상의 범죄행위가 기업활동의 수단으로 허용될 수 없고 경영판단으로 보호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박씨 등 소액주주들은 소액주주운동의 일환으로 1998년 10월 20일 삼성전자의 부당 내부거래 등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모두 3,500여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경제 5단체 "경영활동 위축 우려" 성명

이 판결과는 별개로 서울지법 민사합의 18부도 같은 날 심모씨 등 3명이 “소액주주의 주주총회 참여를 막아 액면가 이하의 신주 발행안을 통과시켰다”며 ㈜대우전자를 상대로 낸 주주총회결의 취소 청구소송에서 “신주의 액면미달 발행 승인부분을 취소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소액주주의 총회장 입장과 발언권 요구를 막은 채 회사측이 안건설명이나 토의ㆍ표결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안건을 통과시켰다”며 “소액주주들이 안건을 부결시킬 수 있는 지분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충분했으므로 승인결과를 취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법원은 심씨 등이 이 회사를 상대로 낸 주주총회결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도 받아들여 액면미달의 신주발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 판결에 대해 재계는 경영활동 위축, 유사소송 남발로 인한 경영혼란 및 신속한 의사결정의 지연 가능성 등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재계의 한 고위인사는 “경영상 의사결정은 항상 리스크를 수반하는 것”이라며 “경영활동에 책임은 져야겠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금전적 배상이 수반된다면 누가 이런 리스크를 안으려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재계는 특히 모든 재벌총수들이 검찰조사까지 받았던 6공 시절 정치자금 제공과 관련, 이건희 회장에게 배상판결이 내려짐에 따라 다른 대기업에도 관련소송이 잇따르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나아가 새해부터 집단소송제가 도입될 경우 남소(濫訴)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배상판결을 받은 삼성전자의 전ㆍ현직 임원들은 개별적으로 항소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현재 1,000억원 규모의 임원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한 상태지만, 보험의 소급적용일이 1998년4월로 되어있어 이번 판결대상 사건을 모두 보험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영화 사회부기자

입력시간 2002/01/03 14:24


김영화 사회부 yaa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