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국회의원 김홍신의원

"왕따 각오, 소신 꺾을 생각 없다"

국회의원 김홍신(54ㆍ한나라당)은 好, 不好가 뚜렷하다. 可, 不可가 분명하다. 그래서 인생이 고단하다. 당론인 건강보험 재정분리 법안에 반대해 지난 성탄절부터 시작한 농성이 벌써 며칠째. 의원회관 302호 자신의 집무실 한가운데에 농성 자리를 폈다.

주장의 당위성은 차치하고라도 소신파라는 저간의 이름엔 또한번 확실히 못을 박았다.

언론으로부터 쏟아지는 시선, 정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의 격려, 지지 방문, 그의 홈페이지엔 국민들의 응원편지가 밀려들고 있다. 도처에 ‘의리’만 남고 소신은 실종된 시대, 그는 메이저인가,마이너인가. 캄캄한 저녁, 맨발에 목소리가 푸석해 진 그를 ‘농성장’에서 만났다.


“국민 위해서도 분리는 최선 아니다”


- 같은 당내 국회의원들끼리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이런상황까지 오는 현실이 참 갑갑하다. 꼭 이 방법밖엔 없었나?

“이보다 더한 것까지 생각했다가 주위의 만류로 물러섰다. 이런 연말은 나도 평생 처음이다. 난들 이렇게 세밑을 보내고 싶겠는가.

하지만 국회의원으로 들어올 때 분명히 ‘소신과 양심을 지키겠다’는 선서를 했고, 욕을 먹더라도 이를 지킬 것이다. 나를 만나고 가면서도 다녀갔다는 사인도 못하는 동료들 심정을 생각하면 더 갑갑하다.”


- 꼭 재정통합이라야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뭔가? 재정분리를 주장하는 쪽에선 특히 소득파악률 등의 문제를 들어 합쳐봐야 재정이 더욱 악화될 뿐이란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많은 공부가 필요한 사안이다. 당론으로 무조건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재정통합이 꼭 필요한 이유는, 직장건보 적자에 대한 대안이 없는 현실에서 통합이 돼야 그나마 지역건보의 흑자로 직장건보의 적자를 메울 수 있다는 것, 또소득이 노출된 직장건보 가입자가 손해라는 논리도 통합후 각 보험료 부과방식을 달리하므로 전혀 문제가 없고, 오히려 이대로 재정 불균형이 계속될 경우 보험급여를 확대할수 없다는 점 등 많다.

또 소득파악률 문제란 것도 완전한 소득파악이 될때까지 통합을 미루겠다는 소리는 안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어느 나라도 완전히 소득파악이되는 나라는 없다.

재정분리안은 당을 위해서도 역효과다. 두고보라, 내년 지방선거,대선때가 되면 지금보다 재정이 더악화되면 악화됐지 나아지진 않을 것이다. 솟구치는 보험료 인상 때문에 국민의불만도 더 클 것이다. 그때 가서 민주당이 그 화살을 우리에게 돌려 진작 한나라당에서 제동을 걸어 통합을 막은 탓이라고 공격한다면 어쩔 것인가. 국민을 위해서도, 당을 위해서도 이건 최선의 선택이 아니다.”


- 당내에선 ‘설득할 기회를 줄땐 설득하지 못하더니 왜 농성이냐, 김의원 소신만 소신이고 다른 동료 6명의 소신은 소신도 아니냐’는 말도 있던데, 이 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리 당론을 정해놓고 나더러 설득을 해보라니 결론은 뻔한 것 아닌가? 또 그분들 소신도 당연히 소신이다. 언제 내가 아니라고 한 적이 있나.

하지만 단지 당론이란 이유로 제대로 내용도 모른 채 따라가는건 문제가 있다는 거다. 내가 항의하는 것은 당론의 결정 방식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과거에도 나는 당론과 배치되는 입장에 선 적이 많지만 진지한 토론을 거친 뒤 내 의견이 절대적으로 밀릴땐 두말없이 깨끗이 승복했다.

나라고 승복하지 않은게 아니다. 이번 사안도 의원총회에 붙여 최소한 두번 이상 충분한 토론을 벌인 뒤 여전히 반대쪽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면 내 스스로 사보임을 선택하거나 기권할 수도 있었다. 그런게 다수결이고, 민주주의다.”


- 이번 일을 인기를 의식한 돌출행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인기라면 이미 나는 누릴만큼 누려 본 사람이다. ‘인간시장’으로 국내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고등학교, 대학교때부터 각종 문학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학교에선 내내 빅 스타였다.

군대에서도 소대장이 된지 3일만에 간첩을 잡아 영웅 대접을 받았다. 졸업한 뒤에도 소설로, 방송 진행자로 남부럽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건 다 해봤고, 국내 최초라는 이름이 붙은 기록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얼굴이라면 이미 팔릴만큼 팔린 내가 이 나이에 새삼 뭔인기가 아쉬워 이런 얕은 수까지 쓰겠는가.

더구나 얄팍한 인기 노림수는 언제든 곧 들통나게 돼 있다. 세상이 그렇게 어수룩한게 아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난 거의 매년 의정활동 평가에서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아왔고, 며칠전에도 한국언론인연합회에서 주는 ‘올해를 빛낸 정치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열심히 일했고, 최선을 다했으며, 소신을 지키며 살았다고 자부한다. 자신있고 떳떳하니까 양심을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과장급 국회의원

문학박사로서 현재 건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를 맡고 있기도 한 그는 문학과 사회참여, 그리고 정치입문의 길을 거쳐왔다.

1980년대, 소설 ‘인간시장’의 폭발적인 인기로 ‘장총찬 신드롬’을 탄생시켰고, 이어진 실천문학, 경실련 등에서의 적극적인 현실참여운동은 결국 그 자신도 뜻하지 않았던 정치현장에까지 그를 데려다놓았다. 15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 오늘까지 왔다.

그간 붙은 별명이 많다. 상습적 당론거부자, 작은 거인, 국회안의 왕따 등. 왕따가 된 것은 15대 국회 참여 첫 발부터 ‘무노동 의원세비 자진 반납’을 벌이면서부터 예고됐다.

16대 국회에서도 어김없이 되풀이된 이것은 결국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끌어들여 작년 정기국회에서 관련법안까지 통과된 상태다. 명패도 없고, 명함에 국회의원이란 이름도 쓰지 않는 의원.

단독 공간 대신 자신의 방안에 보좌관, 비서관의 책상까지 함께 들여놓고 공동 사무실처럼 쓰고 있어 후배 의원들에겐 ‘장관급 아닌 과장급 국회의원’이란 농담을 듣는 사람.

카펫이 깔린 의원전용 출입구를 마다하고 쪽문으로만 출입하는가 하면 의원전용 사우나 시설도 외면, 대변인을 맡았을땐 ‘할 말이 있으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된다’며 ‘대변인 무용론’을 외치는 등등 숱한 화제를 뿌렸던 주인공이다. 그렇듯 돌출적이고 당당한 행보를 보여온 그가, 그런데 요즘따라 허수아비 얘기를 자주 꺼내고 있다.

“ 내 자신이 마치 추수가 다 끝난 황량한 빈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느껴진다. 아무 쓸모도 없어진 허수아비 말이다.”


- 무엇이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가.

“한마디로 왕따이기 때문이다. 국회에 들어선 처음부터 세비 반납문제로 동료들 사이에선 ‘인기작가라 돈 나올데가 많아서 저런다’ ‘혼자 잘난척 한다’는 등등 욕을 먹었고, 이번에도 다른 의원들이 ‘당신 때문에 한나라당이 망하는 꼴을 봐야되느냐, 나가라’며 내게 소리를 지르는 등, 그런 일을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이들이 죽고 싶다는 심정을 이해할것 같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쨌든 본인이 만든 일 아닌가. 정 힘들면 남들처럼 따라가면 제일 간단한 것 아닌가.

“그렇다고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아는데 그냥 따라갈 수는 없지 않은가. 집에선 나더러 ‘당신 팔자가 그 모양으로 생긴것 같다’고 도한다.

국회의원이 되기전에도 단 한번도 조용히 넘어간 해가 없었다. 의원이 된후엔 단 몇달도 편하게 넘어간 적이 없다.”


주간한국과는 특별한 인연

그는 소설, 방송, 정치활동을 막론하고 그간 적지않은 필화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그 엉뚱한 파편 하나. 워낙 평생 많은 공갈, 협박 전화에 시달리다보니 이젠 부인과 장성한 아들, 딸 모두 혀를 내두를만큼 협박전화 처리에 도사급이 돼 있다.

그는 주간한국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스물두살의 자서전’이란 원제 아래 ‘인간시장’이 처음 연재된 곳이 바로 본지였다.

1980년대, 유례없는 ‘검열공화국’의 눈총을 받아가며 장장 5년간 연재를 이었다. 검열정부의 압력으로 ‘권총찬’이었던 주인공 이름이 ‘장총찬’으로 바뀐 사연 등, 집필에 얽힌 당시의 현장취재담과 주변 이야기들을 지면상 다 싣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연재를 시작하기 직전에도 국가체제비방, 국가원수 모독 등의 이유로 저서 ‘도둑놈과 도둑님’과 관련, 계엄사에 잡혀간 바 있다.


- 같은 문학인으로서 책 장례식 등으로 논란이 되었던 이문열씨의문학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이야기는 하지 말기로 하자. 나는 문학을 하는 동시에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내가 아무 말 않는 것이 모두를 도와주는 일이다. (잠시 침묵) 세상이 시끄러울땐 말이란게 쇳조각과 같아서 나도 다치고 남도 다치게 한다.”


- 과거 소설 뿐 아니라 꽁트도 많이 발표했는데, 실제로 요즘 국회주변에서도 꽁트같은 일이 정말 많이 일어나고있지 않은가.

최근 김 의원이 주도한 ‘개고기 불간섭’이라는 웃지못할 이름의 선언까지 나오게 된 배경도 그렇고, 한때 김 의원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모 의원의 (수억원대)국공채, 어음 소동도 화제가 됐는데.

“개고기는 몇년전부터 합법화를 주장해왔었고, 그 어음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다만, 그 일이 있고나서 다른 의원들까지 전부 서랍 정리를 싹하게 만들어줬으니 좋은 일 한거다.(웃음)”


- 고집이 원래 세었나.

“아마도 어머니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는 크게 배운 것도 없는 분이면서도 아주 엄하고 매섭게 나를 가르치셨다. 가령 여름날 마당에서 밥을 먹다가 실수로 흘렸을때도 어머니 손짓 한번이면 그 흙 묻은 밥알을 지체없이 주워 물에 씻어 먹어야했다.

내가 외아들인데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혹독하게 하셨다고 커서 물어봤더니 싹수 없이 자란 놈이란 소릴 듣지 않게 하려고 그랬다고 하셨다. 백부께 후손이 없어 내가 양자로 보내질 상황에서도 어머니가 끝까지 반대해 집안에선 평생 불편한 입장으로 사셨다.

초등학교 3학년때, 촌수로 아저씨뻘 되는 친구와 싸웠다가 열여덟살이나 먹은 그 집 큰형한테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

그러자 어머니는 곧바로 동네 느티나무로 달려가 새끼줄로 칭칭 동여매더니 그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그 당숙 할아버지, 할머니가 와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고서야 일어나셨던 어른이다.”


-15대, 16대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거의 매년 언론과 시민단체 등의 의정활동 평가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데, 비결이 있는가.

“ 열심히 일했고, 유능한 보좌관들을 얻은 덕도 크다. 똑같은 사안이라도 접근하는 관점에 따라 그 결과나 성과는 달라질 수 있다.”


나홀로 농성 ”외롭네요”


- 이번 농성은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

“뜻이 관철될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옛날에도 농성을 한 경험이 꽤 있지만, 이렇게 혼자서 농성을 벌이긴 처음이다. 그땐 여럿이 함께라서 외롭진 않았는데..…”


- 어쩌면 새해도 이 자리에서 맞을텐데, 새해 계획은 세웠는가.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만 열심히 하려고 한다. 거창한 계획을 세워봐야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취재가 끝난 뒤 방문객 안내 데스크로 내려오자 직원이 ‘농성이 언제까지냐’고 물었다. 늦은 밤, 차들로 엉켜있던 국회의사당 앞 도로도 어느새 한산해졌다.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떠도는 이 육지의 섬에도 다시 아침이 오긴 오는 것일까.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2/01/0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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