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경제서평] 신용카드에 결박당한 현대인의 자화상

■머니 멘터
(태드 크로포드지음/ 이종인 옮김/ 미래 M&B 펴냄)

신용카드는 참 묘한 물건이다. 현금과 같지만 전혀 돈 같지가 않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찰을 내면 못 살 것도 카드로는 종종 구입한다. 조금이라도 연체가 되면 초 고금리를 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그런 낭패를 꽤나 여러 번 당했으면서도 카드 사용은 생각대로 잘 자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갈수록 더‘호기 있게’ 카드를 꺼낸다.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는 얼마 전가계부실 문제를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중앙은행 총재로서는 이례적이었다. 핵심 중 하나는 신용카드 연체율이 10%에 육박해 신용불량자와 가계 파탄이 속출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2001년 12월1일 기준으로 신용카드 대금을 제때 지불하지 못한 신용카드 관련 신용불량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집계도 있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지난 10월말 현재 신용카드 발급 매수는 8,118만장을 기록해 2000년 말보다 40.3% 늘었다. 15세이상 경제활동인구 1인 당 3.6매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길거리, 지하철 역 등 사람이 조금이라도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간단한 판을 놓고 고객을 부르고 있는 신용카드 모집인들을 보면 1인 당 3매는 적은 것 같다. 지금 당장 지갑을 꺼내봐라, 카드가 몇 장 있는지.

이 책은 ‘소설로 읽는 돈과 부채 관리의 비밀’이라는 다소 거창한 부제를 붙였지만, 결국 신용카드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23세의 직장인으로 돈은 많이 벌지 못하면서도 신용카드에 중독된 여자다.

대학에서의 전공이 무용인 그녀는 학자금 융자, 치료비, 의상비 등을 모두 신용카드로 결제한 후 제때 갚지 못해 모두 3만7,000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신용카드는 총 13개다.

너무나 많은 빚 때문에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가 자신처럼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카운슬링을 해주며 용기를 북돋워주는 머니 멘터(금전의 스승)를 만나 경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이 소설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 책이 신용카드의 엄청난 빚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과정만을 그렸다면 별로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뻔한 이야기일 테니까. 이 책은 주인공과 머니 멘터의 대화 가운데서 돈과 일, 돈과 시간, 돈과 세금, 돈과 나눔과 사랑 등을 말하고 있다.

약간 과장되게 말하면 일종의 철학적 우화이기도 하다. “태초에 신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어요.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서로 너무 사랑해 신은 걱정했어요. 너무 행복하면 두 사람이 신을 숭배하는 것을 잊을까 봐서요. 그래서 신이 만들어낸 것이 돈이래요.” 돈은 이렇게 생겨났단다.

또 줄곧 ‘사랑하는 빚을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빚지지 마라’(이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기도 하다)를 강조하고 있다.

신용카드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것을 하나만 소개하자. 신용카드 대금을 제때 갚는 사람들을 회사는 ‘무임 승객’이라고 부른다. 회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고객은 대출 한도의 빚을 전액 갚을 수는 없지만 매달 최저 결제를 하면서 파산하지 않는 사람이다.

신용카드도 일종의 중독이다. 마약이나 알코올과 같다. 머니 멘터는 주인공에게 카드 중독자 모임인 DA(Debtors Anonymous)에의 참여를 권유하고, 망설이던 주인공은 모임에 참가해 마침내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게 된다. DA는 알코올 중독자들의 단주 모임인 AA(Alcoholics Anonymous)를 연상시킨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주인공이 신용카드를 모두 가위로 자르는 장면이다. “연인이자 좋은 친구였던 카드를 가위의 양날 사이에 넣고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반으로 동강냈다.… 나는 잠시 두려웠다. 신용카드 도움 없이도 살아남을수 있을까? 혼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자유에 대한 꿈은 환상이 아닐까?” 주인공은 결심한다.

“아침이면 이 플라스틱 조각을 13개봉투에 넣어 카드로 한없는 이익을 올리고 있는 회사들 앞으로 반송할 것이다.”

이 소설은 강렬하거나, 드라마틱하지 않다. 중간에는 조금 지루하기도 하다. “내 경험이 그렇게 독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날마다 빚과 마주치는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이기 때문에 들려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뭔가 ‘찡’하는 느낌이 든다. “내 이야기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빚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데 도움이되었으면”이라는 주인공의 말에 공감해서일까.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머니 멘터가 들려주는 돈과 부채에 관한 10가지 충고는 한번쯤 곱씹어볼 만하고, 책 말미의 ‘재정상태 체크리스트’는 재미있는 부록이다.

입력시간 2002/01/0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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