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박정희와 역사법정

2002년 새해 새소식은 1월2일자 신문이 휴간했기에 3일에야 볼 수 있었다. 이날 신문에 평양사진이 한장 실려있었다.

1월1일, 평양 금수산궁전에 숙청(?)되었다던 김용순 대남비서와 함께 여러 실력자들이 ‘영원한 주석’ 김일성 ‘수령’ 입상 앞에 서 있다.

서울에는 대통령 후보경선에 나서겠다는 박근혜 부총재, 1월15일께 대선 출마를 선언 하겠다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 민주당의 후보들 중 어느 누구도 서울 동작동의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 했다는 사진도, 뉴스도 없다.

지난해 12월 27일 국정홍보처는 전국의 성인 남녀 4,5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의식과 가치관’을 조사, 발표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1위 박정희 전대통령(21.1%), 2위 세종대왕(19.8%),3위 이순신 장군(12.7%), 4위 김구 주석(10.5%)이었다.

왜 이들 대선 후보들은 ‘박정희’를 무시 하고 있을까. 바보 같은 질문에 엉뚱한 대답이 될지도 모른다. 헌법학을 전공한 동국대 한상범 교수(민족 문제연구소장 겸임)의 ‘박정희-역사 법정에 세우다’나 대구 효성가톨릭대 역사교육과 최상천 전교수의 ‘알몸 대한민국, 빈손 김대중’을 읽었기 때문일까.

두 사람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옳아서 였을까. 국민의 여론이 너무 그들의 신념과 달라서였을까.

한 교수의 ‘박정희’는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박정희라는 여론조사가 나온 후에 책을 썼다 해도 그 답은 같았을 것으로 추론 된다.

그의 책에는 “구름 위 세상에서 박정희 심판법정”이 세워져 이승에서의 여론조사와는 완연히 다른 저승에서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박정희가 살아온 만큼의 세월을 우선 근신 자중 반성을 통한 학습을 할 것과 동시에 그와 일당이 해를 끼쳐서 이미 저승에 들어온 희생자를 매일 찾아보고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도록 처분한다.”

저승에서의 재판은 배심원제로 심판관에는 전봉준 장군(갑오 농민군 대장), 안중근 의사(이등박문 처단 의거자), 김구 선생. 배심원은 배심장에 박은식(임시정부 대통령. ‘한국통사’저자), 배심원은 신채호(역사가) 함석헌(민권 운동가. ‘뜻으로 본 한국역사’저자), 강동진(‘일본의 조선지배정책연구’저자, 역사학교수) 등 11명.

소추인(검찰관)은 장준하(‘사상계’ 발행인), 박상희(박정희의 형, 신간회 지방간부), 장면(국무총리), 전태일(분신자살한 평화시장 노동운동가), 월남전 참전 전사자,사망한 YㆍH 여성노동자, 자살한 도시빈민 가장 등이다. 특별 변호인은 이완용(을사오적중 1명), 엄민영(내무부장관), 일본인 전범 기시 노브시게(수상), 고다모 요시오(한일회담 막후인물) 등이다.

재판부 구성에서 보듯 박정희 피고는 독재자, 친일분자,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5ㆍ16 군사쿠데타 주도자 등으로 ‘근대화를 이룬 혁명가’와는 전연 다른 차원에서 죄를 선고 받았다.

재판부가 민족 독립운동가로 구성되어 있는 탓인지 박 피고인은 최후 진술에서 “이땅에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없길 바랍니다”는 말 대신 “이땅에 아니 이승에서 나같이 민족을 배신하는 반 민족자가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한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일본 메이지 헌법의 ‘천황 신성불가침’ 정신을 우리 헌법에 도입, 대통령의 긴급권, 국가원수 면책특권을 강화시킴으로써 국민을 정치적으로색맹화 시켰고 대중의 일부를 민주주의 불감증에 빠지도록 했으며 지역주의 편견의 포로가 되게 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실적이 태산처럼 크다면 실정(失政)은 심연처럼 깊다는 것이다.

이에 동조하듯 지난해 4월 저서 ‘알몸 박정희’를 통해 박정희를 일본 군국주의, 천황주의 신봉주의자로 몰아붙였던 최상천 전교수는 그를 조폭정치를 상징하는 두목으로 부르며 다시 ‘알몸’의 영향이 올해 대선에 미칠 파장까지 내다 보고 있다.

최 전교수는 이번 책에서 21세기를 맞은 한국의 정치가 난장판이 되고 이를 수습해야할 김대중 대통령이 ‘빈손’이 되어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그는 김 대통령이 정권교체, 남ㆍ북 정상회담, 노벨상 수상 등으로 역사적 삼관왕이 되었으면서도 빈손이라는 사실에 분노마저 느끼는 듯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1997년12월 5일 영남 표를 얻으러 박지만을 앞세운 박정희 생가 참배는 사적화해이며 두목정치의 특색인 대야합이 되었다는 것이다.

최 전교수는 김 대통령은 오른손에 박정희를 두목으로 하는 집단과 야합하고 왼손에는 복지사회와 서민을 내세워 진보를 손에 쥐고 싶어하지만 2002년 현실은 김 대통령의 두 손을 비게 했다고 보고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후보자들이 빈 손을 해결하는 길은 박 전대통령을 역사법정에 세울 것인가,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로 받아 들일 것인가에 대한 신념을 표현해 표를 얻는 것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1/0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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