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91)] 시코쿠메구리(四國巡り)

연말부터 1주일 이상 이어진 새해 연휴로 도쿄(東京) 도심이 텅비었다. 반면 ‘메이지진구(明治神宮)’, ‘유시마텐진(湯島天神)’등의 유명 신사나 ‘아사쿠사지(淺草寺)’, ‘혼간지(本願寺)’ 등의 사찰로 통하는 길은 인파가 넘친다.

절이나 신사를 찾아 한 해의 복을 비는‘하쓰모데(初詣)’, 즉 새해 첫 참배의 행렬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고 가정이나 기업이 화살이나 복조리 등 다양한 모양의 액땜용 부적을 사서 걸거나 붙여 두는 것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첨단 과학기술과 전통이 공존하는 일본의 모습이다.

거의 모든 일본인들이 '하쓰모데'에 나서지만 특별히 신앙심이 깊어서는 아니다. 일본의 신도와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생활 습관이라고 할 정도로 일상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대부분은 예로부터 전해져 온 것인 데다 남들도 한다는 이유로 '하쓰모데'에 나선다.

반면 믿음이 깊은 사람이라면 전국 각지의 신사나 사찰을 참배하는 순례의 길에 오른다. 각지의 지장(地藏)도량, 관음도량 등 주제별 순례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신불(神佛)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영험한 신불이 깃든 것으로 소문난 절이나 신사를 순례하는 ‘레이조메구리(靈場巡り)’는 일본 국내의 중요한 관광상품이다.

‘시코쿠 메구리(四國巡り)’, 또는 ‘시코쿠 하치주핫카쇼( 八十八ケ所) 메구리’는 일본의 순례를 대표한다.

시코쿠는 과거 아와(阿波)·사누키(讚岐)·이요(伊豫)·도사(土佐) 등 4개의 ‘구니(國)’, 즉 ‘한(藩)’으로 이뤄져 있었고 지금은 각각 도쿠시마(德島)·가가와(香川)·에히메(愛媛)·고치(高知)현으로 이름만 바뀌었다. 4개현의 절 가운데 고호(弘法; 774~835년)대사의 발자취가 서린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것이 '시코쿠메구리'다.

‘구카이(空海)’라는 생전의 법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그는 가가와현 출신으로 일본 ‘신곤슈(眞言宗)’의 개조이다. 그는 42세때인 815년 고향 주변의 산천을 돌며 수행했다. 일본에서 남자는 42세에 일생의 가장 큰 액을 마주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의 수행은 이런 운명의 고비를 넘어 한 단계 높은 도(道)를 얻으려는 발원(發願)이었던 셈이다.

'시코쿠 메구리'는 '무로마치'(室町;1338~1573년) 시대의 사회적 혼란을 타고 본격화했다. 당시 민간에는 고호대사가 입적 당시의 모습 그대로 살아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생전에 이미 ‘헨조콘고(遍照金剛)’, 즉 대일여래(大日如來)의 현신으로 숭앙을 받았던 그는 입적에 앞서 "나를 만나고 싶으면 '헨조콘고'를 염불하라, 그러면 반드시 그와 함께 할 것"이라고 밝혔다.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의 공덕을 얻으려는 믿음이 '시코쿠 메구리'의 출발점이다. 순례객들은 지금도 열심히 ‘나무(南無) 헨조콘고’를 염불한다.

시코쿠 순례의 대상인 88개 사찰은 순번이 정해져 있다. 또 도쿠시마현에 있는 1~23번 사찰은 발심(發心)도량, 고치현의 24~39번 사찰은 수행 도량, 에히메현의 40~65번 사찰은 보리(菩提) 도량, 가가와현의 66~88번 사찰은 열반 도량으로불린다.

순서대로 걸으면 1,440km에 달하고 약 50일이 걸린다. 예로부터 시코쿠 순례객은 존경의 접두어와 접미어가 붙은 ‘오헨로상(お遍路さん)’으로 불려 왔다. 함부로 엄두를 내기 어려운 고행의 길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도 순례객은 줄지 않아 매년 10만명을 크게 넘는다. 최근 수년 사이에는 오히려 늘어 15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중년 여성이 대종을 이루었지만 요즘에는 20대 남녀와 30·40대 남성이 부쩍 늘었다. 장기 불황속에서 잇따르는 실직 등 삶의 고통이 그만큼 깊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관광버스나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매년 2만명 이상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며이 먼 길을 간다. 자살을 결심하고 순례에 나섰다가 삶의 의지를 회복하거나 절망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는 등의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삶의 고비에 고행을 통해 자신을 깊이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고호대사가 세상에 남긴 진정한 축복이다.

'시코쿠 메구리'는 88개 사찰의 경제도 지탱해 준다. 순례객들은 절마다 참배를 하고 스님이 일필휘지로 써주는 '참배 증명서'를 받는다. 절에서 파는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절의 숙박 시설에 머물기도 한다. 적게 잡아도 절마다 연 1억엔을 떨구게 되니 완벽한 정신과 물질의 교환체계이기도 하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2/01/0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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