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권력으로 정치 권력 견제해야"

'함께하는 시민행동' 하승창 사무처장

마른 입술에 푸르스름한 면도 자국, 좁은 어깨에 소탈한 웃음. 성공회대학교 교정에서 만난 시민운동가 하승창(41) ‘함께하는 시민행동’ 사무처장은 더도 덜도 아닌 이 시대의 40대 소시민 모습 그대로였다.

“파주 집에서 버스와 전철을두 번 갈아타고 1시간 반을 오느라 늦었다”는 그의 말 속에서 집시법과 이적단체구성 위반 등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른 열혈 투사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승창씨는 대학가에서 사회주의 이념논쟁이 최정점을 향해 치닫던 1980년 입학한 386세대의 초기 멤버다.

연세대 3학년이던 82년 학내에서 유인물을 배포하다 붙잡혀 집시법 위반으로1년 실형을 살았고, 출소 후에는 인천 등지에서 노동 운동을 했다. 90년에는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삼민동맹)이라는 조직 결성이 문제가 돼다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념투쟁가의 제도권 진입

청년 시절 음지에서 이념 투쟁을 하며 보냈던 그가 시민단체라는 제도권내에서 주목을 받는 인사로 변신한 지도 올해로 꼭 10년째. 시대가 바뀌면서 시민운동의 방법도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30세가 다 돼서야 알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대학가에서 사회주의 이념 운동은 88년을 정점으로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구 소련과 동구권의 해체로 인한 동서 냉전의 붕괴, 세계화의 가속화, 시민들의 의식 성숙 등 주변 상황이 급변한 80년대 말부터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투쟁 방법의 변화에 대한 논의가 심각하게 일기 시작했습니다.

90년대초 2년간의 투옥 생활을하는 동안 이런 문제에 대해 혼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출소 후 사회에 나와 보니 실제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민중당이라는 대중정당을 표방하는 부류도 나타나는 등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음지에서 불법으로 하는 80년대식 운동으로는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본적인 가치나 이념은 변화하지 않더라도 이를 구체화할 개념이나 방법론에서는 변화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런 대안의 하나로 하씨가 첫발을 내디딘 양지는 시민단체였다. 92년 함께 일하자는 경실련의 제의를 ‘현장에서 부딪치며 배우자’는 생각에 받아들였다.

당시 경실련은 창립 3주년이 채 안돼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했던 상태. 하지만 YS의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실련은 정부 정책 수립과 시행에서 적잖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경실련 입단은 반신반의 한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나도 모르게 빠져 들기 시작했습니다. 학생시절 쪽방에서 불법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고 외쳐대도 소리 없이 묻혀버렸던 사안들이 경실련에서는 실제로 정책에 반영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내 손에 의해서 진짜로 세상이 바뀌어지고 있구나’ 하는 짜릿한 기쁨을 느낀 것입니다. 그간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못했던 사회 변혁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이뤄나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적 위상에 걸맞는 ‘책임’엔 미흡”

그러나 국내 시민운동의 현실과 시민들인식 사이에서의 괴리는 한동안 하씨를 혼란스럽게 했다. 시민운동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반대로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그 만큼 높아진 것이다.

특히 97년 김현철 비디오 유출 사건과 99년 유종성 경실련 총장 칼럼 표절 사건을 기점으로 터지기 시작된 시민단체의 각종 추문은 시민단체의자체 반성과 동시에 대외적인 이미지 추락을 가져 왔다. 하씨는 이 파동 여파로 99년 경실련을 떠났다.

“당시 시민단체들이 단기간에 급성장을 하면서 사회적 변화의 요구를 수용할 태세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사회적 역할과 위상은 높아진 반면 그에 걸맞는 사회적 책임을 쌓지는 못했던 것이지요.

그렇다 보니 하나 둘씩 문제점이 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민운동의 정신 자체가 퇴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씨는 4ㆍ13총선에서 총선연대의 활동은 시민운동의 힘을 보여준 동시에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빌미가 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총선을 앞두고 전국 800여개 시민단체가 연합한 총선연대는 국내 선거 사상 유례가 없던 낙천ㆍ낙선 운동을 벌임으로써 정치ㆍ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간 방관자로 남아 있던 유권자들을 일깨워 ‘유권자 혁명’을 일으킨 긍정적인 일을 한 반면 정치 권력을 제어할 수도 있다는 자만을 키워준 것이다.

“총선연대 만큼 시민단체가 정치적 위력을 발휘한 예는 세계사에서도 전무후무할 정도 입니다. 그 파장에 시민단체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시민 단체들은 무기력과 정체성에 빠져있습니다. 총선연대가 이룩한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총선연대 이후 시민단체의 권력화가 문제가 됐지만 사실은 정확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야당과 일부 세력들은 시민단체의 권력화를 지적하지만 사실 시민단체는 ‘정치 권력’을 가진 게 없습니다.

물론 총선연대이후 ‘사회적 권력’을 갖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치 권력을 견제하는 사회적 권력은 시민사회에서는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입니다.”


“시민운동은 소시민이 주체여야”

하씨는 그간 시민운동이 변화ㆍ발전하는주요 시기마다 항상 최전방에 있었다. 경실련의 초기 멤버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정보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고, 신개념의 납세자 운동을 선도하고 있다.

올해 시민운동은 또 한차례 변화를 요구 받고 있다. 그래서 하씨 등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지고 있다.

2년 전부터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하씨는 ‘요즘도 시민운동의 방향을 끊임없고 고민하고 있다’는 말로 최근 심경을 밝혔다.

“예전 시민운동은 소수의 엘리트가 운동을 이끌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시민운동은 소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자발적인 운동이 되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2001년 최악의 '밑빠진 독' 상

함께하는 시민행동(공동대표 이필상)은 2001년 최악의 `밑빠진 독상'에 농림부의 `새만금 사업'을 선정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12월 19일부터 닷새간 네티즌 1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1조8,300억원의 예산낭비가 발생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새만금사업이 82표(46%)를 얻어 최악의 밑빠진 독상으로 선정됐고 국회의 `전자투표장치'(18.29%)와 행자부의 `무궁화심기사업'(9.7%)이 각각 뒤를 이었다.

이밖에 61억원의 예산을 낭비했다는 지적을 받은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와 건교부의 `시화호 사업' 도 밑빠진 독상부문 상위에 올랐다.

예산낭비가 발생한 국가사업을 대상으로 올해 9차례에 걸쳐 밑빠진 독상을 선정한 시민행동은 내년에는 예산낭비를 막은 우수사례를 선정, `밑빠진 독을 막는 두꺼비상'을 발표할 예정이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1/10 16:07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