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92)] 슌토(春鬪)

일본 최대의 노동조합 조직인 ‘렌고(連合·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는 9일 확대전술회의를 열고 2002년 임금교섭방침을 확정했다. 경영자 단체인 닛케이렌(日經連)도 11일 임시총회에서 교섭지침을 승인, 일본의 올해 ‘슌토(春鬪)’가 사실상 시작됐다.

'슌토'는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투쟁이 봄철에 집중된 데서 나온 말로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어인 '춘투'가 그대로 쓰인다.

일본의 임금교섭이 봄철에 집중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정부의 회계연도가 4월1일 시작되며 대부분의 기업도 이에 맞춰 3월말을 결산기로 잡고 있다. 예산·회계상의 새해인 4월부터 새로운 임금을 적용하려면 3월말까지는 임금교섭이 끝나야 한다.

또 대개 10월말부터 공표되는 9월말 중간 결산과 이에 따른 결산 전망을 보고서야 노조측이 임금인상 요구안 작성에 들어가기 때문에 1월 신춘에야 최종 요구안을 내놓을수 있다.

일본의 춘투는 1955년 당시 일본 최대의 노동조합 조직인 ‘소효(總評·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가 임금인상투쟁을 공식 방침으로 삼으면서 시작됐다. 50년 결성 이래 '소효'는 경제 투쟁을 정치 투쟁에 결합, 정치 변화를 통해 임금과 실업 문제도 해결할수 있다는 정치투쟁 위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따라서 임금인상 투쟁은 기업별 노조의 몫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의 불황기를 맞아 53, 54년임금인상 투쟁이 대부분 실패로 끝난 것을 계기로 '소효'는 지도부 개편과 함께 노선을 전환, 경제투쟁의 독립성을 인정했다.

또 산업별 노조(노련)단위의 통일 투쟁으로 기업별 노조의 약점을 극복하면서 임금 인상을 실현한다는 방침을 채택했다.

이에 따른 일본의 춘투는 산업별 노조가 중심인 구미와 달리 산업별 노조를 결집한 '소효'가 산업별 평균 임금인상률을 제시, 기업별 노조의 임금교섭을 지도하는 특이한 형식으로 전개됐다.

우선 전투성이 강한 중추 노조들이 파업을 내세워 전년보다 높은 임금인상을 확보하면 이를 지불 능력이 있는 기간 산업군에 정착시키고, 노동위원회 중재 등을 통해 나머지 기업에도 확산시키는 것이 '소효'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경영자측은 크게 반발했으나 60년대 고도 성장기를 맞은 노동력 부족과 물가 상승 등을 배경으로 춘투는 연례 행사로 자리잡았다. 정치적 이유에서 '소효'에서 떨어져 나와 64년에 결성된 ‘도메이(同盟·전일본노동총동맹)’도 춘투에서는 공동 보조를 취했다.

춘투 결과는 미조직 노동자의 임금 인상으로 이어져 일본 노동자 전체의 명목 소득 상승의 기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쌀값 결정 등 자영업자의 소득 상승에도 기준으로 적용되는 등 소득과 소비수요 측면에서 국민경제의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64년 반일(半日)총파업을 앞두고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당시 총리가 직접 '소효' 대표와 담판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또 춘투에 의한 높은 임금 인상률은 경영측의 불만과는 달리 결과적으로 소득 향상과 내수 확대로 일본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70년대 중반 일본의 춘투는 전환점을 맞는다. 74년 사상 최고 수준인 32.9%에 달했던 임금 인상은76년 이후 한자릿수로 크게 낮아졌다.

석유 위기 이후 일본 경제가 정체기로 접어 들면서 중추 노조들의 투쟁력이 저하, 실력 행사가 줄어 들면서 나타난 현상이자 소득 상승으로 조합원의 춘투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이 기본 배경이었다.

80년대 들어 실력 투쟁에 의한 임금 인상이라는 춘투의기본 성격은 거의 사라졌으며 '소효'의 지도력도 한계에 이르렀다.

87년 노조조직률이 27.6%까지 떨어져 내린 가운데 새로운 전국 통일조직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해 졌다. 89년 '소효'의 해체와 동시에 '렌고'가 결성되면서 일본에서 투쟁적 춘투는 자취를 감추었다.

'렌고'는 80년대 들어 싹텄고 오늘날 흔히 일본노사관계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대화와 타협'을 기본 노선으로 삼았다.

좌파의 ‘젠로렌(전국노동조합총연합)’이 전국 조직으로 남아 있긴 하지만 규모가 렌고의 7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렌고'의 온건 노선에도 불구하고 노조 조직률은 해를 거듭할수록 낮아졌다. 2001년 6월말 현재 노조 조직률은 20.7%로 47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 최저를 기록했다.

'렌고'는 올해 결성 이래 처음으로 임금 인상 요구안을 내지 않고 고용과 정기 승급 유지에 치중한다는 춘투기본 방침을 결정했다.

지난해 임금 인상률이 사상 최저인 2.01%에 머문 데다 불황이 더욱 심각해 임금 인상 요구가 무의미한 반면 고용 불안이 심각하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임금 인상 투쟁은 55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기업·산업별 노조에 맡겼으니 일본 춘투의 종언이라고도 할 만하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2/01/1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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