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대통령과 언론

문짝, 게이트는 자꾸 만들어져 이제 네 문짝이 서고 집이 될 판이다. 이용호니, 진승현이니 하는 문짝들은 ‘신승남’ 문짝이 세워지고 나면 푸른 기와집 큰 문짝을 향해갈 기세다.

그런데 청와대 입성을 꿈꾸는 여ㆍ야 대선후보주자들의 정견 속에서 왜 이런 문짝들이 생겨 났는가에 대한 분석이나 대책을 찾기가 힘들다.

민주주의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언론에 대한 신념을 드러낸 적도 없다. 적어도 대중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보도된 적은 없다. 더욱 “김대중 대통령의 언론개혁이 올바른 것이었느냐”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렇게 하겠다”는 등의 소신을들은 적이 없다.

너무 답답해서 였을까. 언론개혁운동에 앞장서온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지난해 12월26, 27일 전국 20세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면접 여론조사를 했다.

세금 포탈 혐의로 3명의 언론사주를 구속시킨 세무조사에 대해 엉뚱한 답이 나왔다. 세무조사를 통해 언론개혁이 이루어졌다가 28.5%, 이에 동의하지 않은 응답은 61.9%였다.

또한 세무조사가 언론 탄압이었다는 비중은40.1%로 탄압이 아니다는 49.6%보다 낮았다. 응답자의 59.3%가 구속된 언론사주 석방을 언론의 힘에 밀린 정치적 고려라고 봤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세무조사, 언론사주의 구속, 추징 세금부과 등을 통한 언론개혁에 대해 40~61%가량의 응답자가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김대중 대통령의 언론개혁은 그것이 정치적이든 순수 개혁적이든 절반 이상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완곡한 여론은 1월 10일 박준영 국정홍보처장이 윤태식 게이트에 연루 되었음이 밝혀진 후에는 어떻게 변했을까.

자민련 정진석 대변인의 코멘트에서 여론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언론을 총괄하며 오랫동안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좌해온 박 처장은 이 정부 개혁정책의 전도사를 자처해온 ‘개혁의 분신’이었다. 박 처장을 부패게이트의 몸통으로 몰아 권력핵심부에 대한 수사를 얼버무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없는지…”

이에 대한 답변은 윤태식 게이트가 계속 진행되고 있고, 김 대통령이 언론 개혁의 성과에 대해 아직 언급이 없기에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 대통령제를 159년 앞서 실시한 미국의 대통령과 언론과의 관계에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 역사에서 20세기 첫 대통령은 윌리엄 매킨리였지만 1901년 9월 암살로 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가 대통령이 됐다.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나이 어린 42세였다. 혁신주의(개혁) 대통령, “협상은 부드럽게, 간섭은 몽둥이를 들고”를 외치는 ‘제국주의 대통령’, ‘자연보존 주의’를 실천한 첫 대통령 등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그는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순위로 치면 5번째 이내에 꼽힌다.

루즈벨트의 신념과 정치적 업적은 그의 자전적인 자기표현에서 잘 나타나 있다.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나는 대통령이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사용할 것이다. 나는 권리의 침해를 말하는 사람들의 비판의 소리를 개의치 않는다… 나는 강한 행정수반을 믿으며 권력을 믿는다.”

“권리의 침해를 말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언론을 가리킨다. 임기 말인 1908년 12월, 조셉 퓰리처(1847~1911)가 사주인 뉴욕 월드는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서는 치명적인 ‘부정직한 증언’을 했다는 기사를 냈다.

루즈벨트가 1903년 파나마 운하를 파면서 미국이 프랑스에 제공한 4,000만 달러 중 일부를 로비스트 넬슨 크롬웰, 루즈벨트 처남, 차기 대통령당선자인 테프트의 동생 등이 챙겼으며 루즈벨트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퓰리처는 16세에 미국 남북전쟁에 군인으로 고용되어온 헝거리계 유대인. 세인트루이스의 신문 발행인을 거쳐 1883년에는 35세에 뉴욕 월드를 사들이고 미국 최초로 100만부를 발행하는 신문의 사주가 된다.

그는 가난한 이민자들, 특히 유대인과 아일랜드인, 독일인들과 노동층, 중산층을 대변했으며 선정주의에서 점차 계몽주의로 발전, 민주공화주의의 주창자로 부상했다.

퓰리처는 루즈벨트가 1909년 2월 자신을 형사처벌 대상인 명예훼손죄로 고발하자 1911년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체포를 면하기 위해 지중해와 대서양을 요트를 타고 유랑했다. 뉴욕타임스는 루즈벨트의 고발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을 불경죄로 다룬, 황제 같은 짓”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전원일치로 대통령의 형사고발은 언론자유를 억압시킨다고 판결했다. 형사고발이 자칫 파나마 운하 건설 의혹 같은 권력형 비리의혹사건을 보도하려는 언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퓰리처는 유언했다. “루즈벨트 시대는 긴 역사 속의 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월드’지는 신문으로 영속한다. 모든 사람은 결코 신문에 재갈을 물릴 수 없고 기를 죽일 수 없으며 테러를 가할 수 없다. 대통령직은 4년에 끝나지만 신문은 매일 나온다.” 여ㆍ야 대선후보들이 알아야 할 언론관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1/1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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