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싹트는 SI사업] 하도급 횡포가 문제

대형 SI업체, 중소벤처기업에 저가 출혈공사 강권

"고질적인 건설 업계의 하도급 횡포는 벤처 업계에 비하면 오히려 양호한 편입니다. 국내 벤처들은 대기업들이 다 발라먹고 남은 앙상한 생선 뼈라도 서로 가지겠다고 피 터지게 싸우는 형국입니다."

국책 전산 SI 사업 부실화의 이면에는 대기업 SI 업체들의 하도급 횡포도 한 몫을 한다. 지금까지 수십억대가 넘는 대형 SI 사업은 재계 랭킹 최상위에 속하는 재벌기업 계열의 SI 업체들이 나눠가며 수주를 독점해 왔다.

대형 SI 프로젝트는 사업 컨설팅에서부터 솔루션, 시스템 장비 도입, 네트워크 구축 및 관리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관리운영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반 벤처기업이 사업을 맡기가 사실상 어렵다.

대기업은 공사 도중에 문제가 발생 하더라고 책임을 갖고 끝까지 공사를 완성할 능력을 갖고 있는 데다, 공사 후 클레임이 발생 해도 책임을 진다는 장점이 있다.

발주를 주는 담당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경우 손해가 나더라도 책임지고 공사를 완성해 낼 수 있는 대형 SI업체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해 발주된 대부분의 대형 국책 SI 프로젝트를 삼성 SDS, LG-EDS, 포스데이타 같은 대기업 계열사들이 독식하다시피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울며 겨자먹기식 헐값 하청

그러나 대기업의 대형 SI 사업 독점 현상은 적잖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일부 대기업 SI 업체들은 우월적 위치를 이용, 약자인 중소 벤처 기업에 저가 출혈 공사를 사실상 강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급 공사를 딴 대기업 SI 업체들은 '저가에 공사를 수주했으니 이 가격에 하려면 하고 아니면 다른 업체에 주겠다'는 식의 일방적인 통보를 한다. 극심한 불황으로 어차피 직원들의 손을 놀리고 있는 중소 벤처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헐값에 일감을 수주할 수 밖에 없다.

지난해 초 산업자원부가 실시한 4대 지역 특성화 사업에 컨소시엄으로 참가했던 A벤처기업은 최근 2차 사업에 참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이 사업은 부산에 신발, 경남에 기계, 대구에 섬유, 경남에 기계 등의 주력 업종을 설정, 이 전통 산업을 E비즈니스에 접목 시키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A사는 이 중 한 지역에 대형 SI업체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에 참가했다. A사는 함께 컨소시엄을 형성한 대형 SI업체가 처음 입찰 단계에서 "이 사업은 앞으로 수년간에 걸쳐 약 수백억원 단위의 공사가 계속될 것이니 거래선을 튼다는 생각으로 가급적 가격을 낮춰서 제안서를 내라"는 요구를 받고 적정 가격보다 낮게 계약서를 제출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A사가 속한 컨소시엄은 1차 사업만 160억여원에 달하는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불황기에 큰 공사를 따내 흐믓해 하던 A사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초 대기업 SI업체가 A사에게 구두로 약속했던 공사비는 약 15억원. 그러나 1년간에 걸친 공사가 끝난 뒤 A사가 SI업체로부터 실제로 받은 공사비는 2억여원에 불과했다. 그 동안 몇 차례 설계 변경으로 규모가 줄어들긴 했지만 그 액수는 원가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금액이었다.

올해 초부터 이 사업은 다시 2단계 프로젝트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러나 A사는 현재 SI업체와 공사비 재산정을 놓고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

A사 한 간부는 "처음 공사를 수주할 때는 '손해는 안보게 해 줄 테니 일단 가격을 내려서 제안서를 제출하라'고 한 뒤 정작 공사가 끝난 뒤에는 각종 하자를 이유로 내세우며 공사비를 후리치고 있다"며 "2단계 사업에서는 밑지고는 더 이상 공사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공공기관으로부터 헐 값에 수주한 만큼의 손해를 대형 SI업체들은 최종 하도급 업체인 벤처들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적정가격이 어디있습니까" 자조

지난해 국내 벤처들은 이처럼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공사를 맡아야 했을 만큼 다급했다. IT업계의 전반적인 불황으로 지난해 적잖은 중소 벤처들이 문을 닫았다. 벤처 활황기였던 2000년에 고배율의 펀딩에 성공했던 일부 벤처들도 일거리가 없어 직원들의 손을 놀리기 일쑤였다.

때문에 이들 벤처들은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사를 맡았다.

또 자본이 없어 허덕이는 벤처들은 외부에 자사 기술력과 인지도를 알려 추가 투자자들을 모으기 위해 손해 보는 공사를 해야 했다. 벤처들은 '생존'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 제살깎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한 중견 벤처의 CEO는 "지난해초 이후 벤처업계에서는 적정 가격이라는 것이 없다. 이제 벤처기업은 '얼마짜리 공사'를 맡아 하는 식의 프로젝트별 수주는 찾아 보기 힘들다.

단지 SI업체가 수행하는 사업에 기술 직원을 보내 한 명당 월 300만~400만원 정도의 인력 파견 비용을 받는 게 당면한 현실"이라며 "이런 척박한 현실에서 벤처들은 문을 닫지 않고 연명하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하소연 했다.

업계의 골리앗 행세를 하고 있는 대형 SI업체들은 지난해 민간 사업이 전무 하다시피 하자 대부분의 영업 인력을 공공 프로젝트쪽으로 돌렸다. 이들 업체들은 대규모 공공사업본부를 구성, 각 행정부처와 공공기관 마다 전담 인력을 두고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삼성 SDS와 LG-EDS의 경우 공공사업팀 인력만 50명을 상회한다. 지난해 극심한 IT 불황 속에서도 대형 SI업체들은 처참했던 벤처 업계와는 달리 그런 대로 견실한 성장을 했다.


대형업체 입찰 제한 등 제도 마련해야

한 SI업체의 공공사업팀 관계자는 "하도급 과정에서 일부 벤처들에게 불이익이 가는 경우가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공사를 발주하는 공공기관 쪽에 있다"며 "관급 공사의 경우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국고 부담 최소화'를 우선 과제로 삼고 예정가를 산정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공사비가 나오기 힘들다. 그 영향은 하도급 벤처들에게 더 클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SI업체 관계자는 "저가 수주로 벤처들만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SI업체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며 "최근에는 예전처럼 대기업이 단독으로 공사를 따내 분배하는 방식이 줄어들고, 입찰 단계에서부터 벤처들도 일정 지분을 갖는 컨소시엄 방식으로 입찰에 참여하기 때문에 하도급 비리는 과거에 비해 많이 사라졌다"고 해명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하도급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발주처(정부)가 소규모 사업에 있어서는 대기업 SI업체의 입찰 참가를 제한, 기술력을 갖춘 벤처 기업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SI업체에게 턴키 방식으로 일괄 수주를 맡겼던 지금까지의 관행에서 탈피, 특별한 하자가 발생하지 않을 사업에 대해서는 분할 수주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1/18 16:20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