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93)] 소카갓카이(創價學會)

재개발 바람으로 많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구릉지에는 어김없이 달동네가 있었다. 집들은 대개 담이 없거나 있더라도 시멘트 블록으로 엉성하게 쌓아 올린 벽이 절반쯤 담을 대신했다.

좁은 골목길은 이집 창에서 손을 내밀면 저집에 닿을 정도였고 낮은 키높이의 창너머로 방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70년대초 밤에 무릎을 꿇고 두손을 합장한 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는 달동네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부쩍 늘었다. 주문은 '남묘호랑객교'로 들렸다.

'남쪽에서 온 신묘한 힘을 지닌 호랑객(南妙虎狼客)을 신봉하는 종교' 정도려니 했다. 대학 시절 불경과 친숙해진 후에야 그것이 ‘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는 ‘소카갓카이(創價學會)’식 염불임을 알았다.

나무묘법연화경은 우리가 흔히 법화경이라고 줄여 부르는 대승 불교의 경전이다. 묘법연화경에 '돌아가 의지함'(귀의·歸依)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나마스(Namas)’의 한역인 '나무'가 붙은 말이다. '나무'는 부처나 보살, 경전의 이름 앞에 흔히 붙는 불교식 존칭접두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묘호렌게쿄'는 '법화경에 귀의한다'는 뜻이자 경전의 이름이지만 소카갓카이나 그 뿌리인 ‘니치렌슈(日蓮宗)’의 가르침으로 보아서는 후자에 가깝다.

소카갓카이는 니치렌슈의 한 갈래인 ‘니치렌쇼슈(日蓮正宗)’의 신도회를 모태로 한 비교적 새로운 종교단체이다. 1930년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1871~1944년)가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1900~1958년)의 도움으로 ‘소카쿄이쿠갓카이(創價敎育學會)’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은 것이 출발점이다.

1937년 발회식을 열어 종교단체로 전환했고 51년 도다가 2대 회장에 오른 후 교세가 크게 확장됐다. 60년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회장의 취임 이후 교세는 더욱 무섭게 커졌고 64년 공명당 창립으로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소카갓카이의 기본 교리는 니치렌슈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회장 개인이 신흥종교 교주처럼 절대적 존숭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기존 불교 종파와는 다르고 그것이 91년 니치렌쇼슈의 소카갓카이 파문(破門)을 불렀다. 79년 회장에서 물러난 이케다 명예회장이 지금도 사실상의 교주로 군림하고 있다.

소카갓카이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신도는 일본에서만 821만 세대에 이르고 청년부에 약 440만명이 등록해있다.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역대 선거에서 나타난 공명당의 득표력에 미루어 신도가 최소한 1,000만명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공명당은 83년 이래 평균 7.3%의 득표력을 보여 왔다. 유권자수로는 약 720만명에 해당한다.

소카갓카이표는 전국 300개 소선거구 평균으로는 2만4,000표이지만 신도가 집중한 도시부에서는 3만표, 대도시부에서는 4만표에까지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소카갓카이표는 공산당지지표 이상으로 강한 결집력을 보이고 있어 도시부 선거에서는 당락을 결정의 중요한 변수이다. 중의원 480석중 31석, 참의원 247석중 24석에 불과한 공명당을 자민당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소카갓카이의 성공은 일본의 골칫거리인 각종 신흥종교의 표본이 됐다. 95년 도쿄지하철 사린가스 테러를 일으킨 옴진리교도 정계 진출 시도 등으로 소카갓카이를 흉내냈다. 폭발적인 교세 확장을 부른 교주의 신격화나 현세 중시도 신흥종교와 많이 닮았다.

우리 달동네에 소카갓카이가 파고 들었던 것도 전통 종교로는 풀 수 없었던 현실 탈출의 갈증 때문이었다.

소카갓카이의 현세 중시 태도는 니치렌슈의 개조 니치렌(日蓮;1222~1282년)에서 비롯했다. 그는 '염불은 무간지옥의 길이고(念佛無間), 선은 천마의 길이며(禪天魔), 진언은 나라를 망치고(眞言亡國), 계율은 나라의 도적(律國賊)'이라고 당시의 불교를 철저히 배격했다.

법화경을 최고로 꼽아 천태종의 기본 흐름을 이으면서도 다른 불경의 존재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독자성을 보였다. 구제 원리를 집약한 법화경의 제목을 외는 것만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대중적 호응을 부른 것은 '나무아미타불'을 일념으로 부르도록 가르친 ‘조토슈(淨土宗)’의 흥성과 비슷하다.

다만 내세의 극락 왕생 대신 정법을 널리 폄으로써 현실 자체를 변혁, 현세에 정토를 실현할 것을 외쳤다는 점에서 그는 독특했다.

그의 사후 니치렌슈는 분열과 쇠퇴를 거듭했으나 19세기말 일본 국수주의와 결합한 ‘니치렌슈기(日蓮主義)’운동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반면 이런 뿌리와는 달리 쇼카갓카이가 일본 군국주의 국가신도 체제하에서 모진 탄압을 받았고 공명당은 현재 역사문제나 주변국과의 관계 등에서 우익세력과 강력한 대결축을 이루고 있다.

현재의 일본을 이룬 많은 요소와 마찬가지로 소카갓카이나 공명당을 일도양단하기 어려운것도 이 때문이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2/01/2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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