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미국판 정경 유착

요사이 미국 언론은 보면 연일 엔론사 사건 보도로 정신이 없다. 상원과 하원의 각 위원회에서 이미 청문회를 열고 있으며, 민주당에서는 이 사건을 빌미로 하여 테러와의 전쟁 이후로 인기 절정에 있는 부시 대통령에 흠집을 내려고 온갖 정치 공세를 퍼붓고 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엔론사의 레이 회장이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에 출마할 때부터 지난 대통령 선거 때까지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으며, 수십만 달러를 기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부시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특혜를 주지 않았나 의심하는 것이다.

특히 레이 회장이 부통령 체니와도 가깝게 지내며 자주 만나면서, 체니의 에너지 정책 수립 과정에도 관여한 사실이 밝혀지고, 회사 상태가 갑자기 어렵게 되자, 직접 오닐 재무 장관과 에반스 상무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말 좋아하는 워싱턴에서는 또 하나의 정치 스캔들이 터졌다고 하면서, 클린턴 전 대통령의 화이트워터 사건이 결국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까지 이어져 탄핵 발의까지 간 것에 비추어 이번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지를 벌써부터 점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미국 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 신청을 했다고 하는 엔론은 도대체 어떤 회사일까. 지난 8월말까지만 해도 80달러를 호가하던 주식이 1달러도 채 안되게 떨어지다 급기야는 상장 폐지된 현실을 보면 또 하나의 인터넷 거품 회사였나 하는 생각이 언뜻 들지도 모른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엔론사는 기본적으로 에너지 중개회사였다. 처음에는 조그만 천연가스 배송 회사로 시작하여 15년만에 포츈 500대 기업에서 7위에 오를 정도로 급성장 하면서, 2000년에는 연간 1,000억달러가 넘는 사업 규모를 자랑하던 회사였다.

이 같은 급속 성장은 전통적인 송유관 회사로서는 불가능했다. 엔론은 송유관 회사를 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에너지 중개라는 사업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석유와 천연가스 같은 자원은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자원이기 때문에 현물 시장뿐만 아니라 옵션이나 선물거래 시장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

반면 같은 에너지원이면서도 전기는 주별로 독점적으로 공급되어왔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와 전력 공급 시장의 독과점 체제가 없어지고 자유경쟁시스템이 도입됐다.

그러다 보니 발전에서부터 일반 가정으로의 배전까지 함께 했던 기존의 전기회사들이 발전시설들을 매각하고 송전회사로 탈바꿈했다. 새로 진입한 경쟁자들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발전시설보다 더 효율적인 곳에서 생산된 값 싼 전력으로 소비자를 공략하면 막아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장 변화를 간파한 엔론은 다른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전력도 중개하기 시작했다. 저쪽중부 오하이오에서 쓰고 남은 전력이 있으면 남쪽 텍사스나 조지아에 있는 수요자에게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선물이나 옵션 등의 기법을 써서 가격 급등락의 위험을 줄이면서 시장에 배분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어 인터넷붐이 일자 인터넷 회선에대해서도 같은 중개 개념을 도입하여 시간대별 회선 용량도 거래하기 시작했다. 시장 자율화의 첨병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력이나 회선 구매자들이 자신들의 구매에 내재한 위험에 대하여 보증을 요구한 것이다. 그 같은 보증은 바로 위험관리 전문가인 보험회사에서 맡아야 하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엔론은 자신들이 컨트롤 할 수 있는 파트너십을 만들어 이 위험을 보증하게 했다. 파트너십에는 엔론의 주식을 발행하여 줌으로써 파트너십의 손실을 보전해주는 체제를 도입했다.

엔론의 손실이 장부에 나타나지 않게 되는 체제다. 이 같은 체제로 과대 계상된 이익이 높은 주가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후 실제 부채액이 밝혀지면서 지금까지 발표된 이익이 허구였다는 것을 알고는 주가가 폭락하게 된 것이다.

엔론 사건이 주는 교훈은 돈의 위력이다. 엔론으로부터 상당한 정치헌금을 받은 부시 행정부가 어떤 비위를 저지른 것 같지는 않다.

다만 1년에 520만달러를 받는 회계법인이 고객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엔론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시로 신주를 발행하여 엄청난 수수료 수입을 올려주는 엔론에 대하여 월스트리트의 증권회사들로서는 쉽게 싫은 소리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미국은 정경(政經)유착보다는 경경(經經) 유착이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IHTE 변호사

입력시간 2002/01/2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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