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마포구 양화진(楊花津) 절두산(切頭山)

양화진(楊花鎭)! 조선조때 한강에는 군인이 주둔하는 3진(三鎭)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른바 송파진(松波鎭), 한강진(漢江鎭)과 더불어 양화진이 그것이다.

양화진은 오늘날 당인리 화력발전소 서남쪽의 외국인 묘지가 있는 잠두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어, 양천(陽川), 강화(江華) 방면으로 오가는 나루터 구실을 톡톡히 하였고 또, 바다를 거쳐 들어오는 물자반입과 검색을 하는 목(項)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근에는 잠두창(蠶頭倉)을 비롯하여, 와우산 동쪽 기슭에는 전라, 충청, 경기, 황해, 평안도의 연안에서 거둬 들여오는 공미(貢米)를 쌓아 두었다가 관리들에게 주는 봉록미를 저장하는 광흥창(廣興倉)이라는 것이 있었다.

광흥창 때문에 ‘창고 앞 마을’이라는 뜻의 창전동(倉前洞)이라는 땅이름을 낳기도 한다.

‘양화’는 길게 뻗친 한강가에 불쑥 튀어나온 땅이라는 뜻의 ‘뻗은 곶’, 이 ‘뻗은 곶’의 옛말인 ‘버든 곶-버들 곶’을 한자로 뜻빌림해 ‘양화(楊花)’로 한 것이 오늘의 땅이름이다.

한강가 양화진의 불쑥 내민 산모양이 흡사 ‘누에머리’ 같다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또, 머리가 하나 더 얹혀있는 것 같다하여 덜머리(加乙頭) 또는 용의 머리라는 뜻으로 용두봉(龍頭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봉우리 뒷자락이 장구허리와 같다하여 ‘장구허리’라 불렀던 곳이다.

그런데 1866년 9월 26일(음력) 아침, 짙은 안개로 뒤덮혀있는 제물포(인천)앞바다 물치도에 로즈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함 세척이 나타났다. 로즈제목은 이곳에서 작은 군함으로 갈아타고 강화도 연안을 거쳐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향했다.

이 괴선박들은 순탄한 항해끝에 같은 달 말일게 양화진을 살짝 비껴 서강에 이르러 배를 멈추고 아예 1박을 하며 남의 나라 수도 한양을 정찰하고는 다음날 10월 1일 인천으로 빠져나가 중국으로 물러났다.

로즈제독의 1차 정찰은 이렇게 끝났으나 사건은 그 달 중순에 일어났다. 10월 13일, 일곱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다시 나타난 로즈제독은 14일 아침 유격대를 갑곶(甲串)에 상륙시켜 16일 결국 강화부를 점령하고 만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다.

대원군(大院君)의 진노는 하늘을 찔렀다. 결국 올 것이 왔다고 판단한 대원군은 10월 22일 전국에 영을 내렸다.

“서양 오랑캐(洋夷)를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라. 화친을 허락함은 매국(賣國)이요, 통상을 함은 패국(敗國)이며, 적이 한양으로 밀어닥침에 이를 피해감은 나라를 위태롭게…”라며 쇄국(鎖國)정책의 고삐를 죄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또 프랑스 군함이 거쳐간 양화진을 새로운 형장으로 지정, 처음으로 천작쟁이(천주교도)이의송(李義松) 김어분(金於忿) 부부와 아들 붕익(鵬翼)을 참수했다. 양이가 더럽힌 한강을 서양에서 흘러 들어온 ‘천작쟁이’의 피로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이곳에는 대원군이 물러난 다음에도 1872년까지 2,000여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의 목이 잘렸다. 그때까지 덜머리 잠두봉, 용두봉이라 불리던 이 산봉우리는 ‘절두산(切頭山)’으로 부르게 됐다.

또, 이곳은 대한제국말 개항, 개혁을 부르짓던 풍운아 김옥균(金玉均)이 참수당한 곳이기도 하다. 절두산이 천주교에서 1급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뻗은 곶(버들 곶:楊花)나루에 잠두(蠶頭), 덜머리(加乙頭),용두(龍頭) 등 온통 ‘두(頭)’자 땅이름에 천주교신자들의 머리 짤린 ‘절두(切頭)’의 땅이다.

입력시간 2002/01/2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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