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덕유산 상고대

“이게 뭘까?” 산을 오르는 한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나뭇가지에 붙어 하얗게 자란 상고대를 가리키면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눈꽃”이라고 대답했다.

눈꽃은 눈꽃인데 이 눈꽃은 종류가 조금 다르다고 설명했다. 눈이 내려서 쌓인 것이 아니라 안개 같은 공기 속의 물기가 추위를 만나 나뭇가지에 얼어 붙은 것이라 했다. 아이는 다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꽃드름이요.” 정답은 아니었지만 원래 이름 못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시인들은 올 겨울을 잃어버린 것 같다. 밤새 몰래 내린 눈도 낮의 기온에 금방 자취를 감추고 만다. 겨울을 만나기 가장 좋은 곳. 산꼭대기이다. 덕유산(1,614㎙ㆍ전북무주군)은 겨울 산행의 명소이다. 3월 초까지 겨울이 머물다 간다. 지금 눈과 ‘꽃드름’의 향연이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산행은 덕유산의 얼굴인 삼공매표소에서 백련사를 거쳐 주봉인 향적봉에 오르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약 9㎞. 오르고 내리는데 6시간 가량 걸린다. 백련사까지의 길은 정답다. 경사가 거의 없는 평지이다.

비파담, 구월담 등 구천동 계곡의 절경이 길 옆으로 펼쳐진다. 물은 완전히 얼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물은 깊고 맑다.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 가는 길을 많이 닮았다. 낙엽은 거의 씻겨 내려가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하늘로 향하고 있다.

백련사는 중창불사가 시작됐다. 구천동 계곡에는 원래 10개가 넘는 사찰이 있었다. 전란과 풍파에 모두 없어지고 이제는 백련사가 유일하다. 신라 신문왕때 백련선사가 숨어살던 곳인데 흰 연꽃이 솟아 절을 세웠다고 한다.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세월을 이야기하듯 단청이 푸르스름하게 퇴색한 대웅전에는 ‘중창불사중’이라는 글씨가 내 걸려있다. 그러나 아직 망치소리는 없다. 대웅전 왼쪽으로 약 30보. 맑은 샘물이 솟는다. 물병을 가득 채운다.

백련사 오른편으로난 등산로로 접어든다. 매표소에서 백련사까지가 워밍업 코스라면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으로 오르는 이 길은 거의 유격훈련 코스이다. 약 4㎞에 불과하지만 대단한 인내를 요구한다. 발걸음과 보조를 맞춰줄 냇물 하나 흐르지 않는다. 미끄러운 흙길과 계단만이 계속 이어질 뿐이다. 매운 겨울의 맛이 이럴것이다. 지루하면서 힘들다.

8부 능선쯤에서 산의 모습이 바뀐다. 힘든 산행에서 변화를 맞는다는 것은 반갑다. 나뭇가지들이 새하얀 잎을 달고 있다. 뽀얗게 가지를 덮은 하얀 잎은 높이 오를수록 무성하다. 9부 능선쯤 됐을까. 눈이 내린 것처럼 천지가 완전히 하얗다. 상고대이다.

상고대는 나름대로의 결정(結晶)을 지니고 있어 단순한 눈꽃보다 조형미가 뛰어나다. 멀리서 보아도 아름답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더욱 신비스럽다. 상고대는 바람을 마주보며 핀다. 북풍이 불면 북쪽으로, 남풍이 불면 남쪽으로 자란다. 상고대를 보면 바람의 방향을 쉽게 알 수 있다.

향적봉 정상. 막바지 산길은 상고대의 위안으로 힘들지 않다. 그런데 정상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다. 등산로는 한산했는데. 복장도 등산 차림이 아니다. 무주리조트 쪽에서 관광곤돌라를 타고 오른 사람들이다.

향적봉 아래 설천봉까지 곤돌라를 타면 20분 산행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깔깔대며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산에서 만난 겨울이 무척 반가운가 보다.

권오현 문화과학부차장

입력시간 2002/01/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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