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이 보물되는 세상] 앤틱바람…돈으로 변한 잡동사니들

생활주변 잡동사니까지 古문화예술품으로 등장

1970년대까지만 해도 빈병, 신문지나 양철 같은 고물은 무시할 수 없는 재화중의 하나였다. 동네 아이들은 이런 잡동사니를 모아 리어커 고물상 아저씨와 엿이나 얼음과자로 바꿔 먹었고, 일부 값나가는 물건은 돈을 받고 팔기도 했다.

그러나 비약적인 경제 발전과 함께 이 같은 고물들은 처리 곤란한 쓰레기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95년 쓰레기 종량제 실시 이후에는 처분하는 데에도 적잖은 돈을 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기도 했으나 최근 상황이 바뀌었다. 고물시장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중고품을 사고 파는 앤틱(Antique) 시장의 급부상이다.


“허섭스레기라니? 다 돈인데”

토요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경매장. 20여평 남짓한 경매장에는 30여명이 경매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 경매에 앞서 경매집행인이 ‘예비 경매를 하겠다’며 5~6개 물건을 약식 경매에 붙였다. 헤드라인에 ‘김일성 사망’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모일간지(1994년)호외 동판이 최초가 1,000원에서 시작해 1만5,000원에 낙찰됐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57년)의 시나리오 책자가 1만2,000원에 팔렸다.

색이 바랜 1976년 3IC슈퍼스타 달력도 3,000원에 주인을 찾았다. 언뜻 봐서는 돈 주고 가져 가라고 해도 가져가지 않을 듯한 물건들이 제법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본 경매가 시작되면서 일반인들은 골동품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잡동사니까지 고(古) 문화 예술품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 ‘뽕’ ‘고래사냥’ ‘산딸기2’ ‘어우동’ 등 80년대 영화 리플렛 5장이 3만원에, 1957년 ‘주부생활’ 잡지가 2만원에 낙찰됐다. 도저히 소리가 나올것 같지 않은 1960년대 진공관 라디오가 2만원에서 시작해 3만원에 낙찰 되기도 했다.

심하게 훼손된 졸업장 보관통, 광복 직후의 수입증지가 붙은 서류, 모 고무회사의 광고 전단지, 연대를 알 수 없는 부서진 화살촉, ‘새마을’ ‘금잔디’ ‘화랑’ ‘진달래’ 등의 담배 포장지, 조악하기 그지 없는 헌 국산인형 등 갖가지 물건들이 경매 됐다.

심지어는 유치하게 그려진 부서진 이발소 그림과 오래된 까스 활명수 빈병, 장롱 문짝 등도 경매에 나왔다. 거래된 물건 대부분이 예전 같으면 집안의 허섭스레기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50년대 만화책이 한권에 100만원

국내 중고 물품 경매 업계는 오랜만에 찾아온 호황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근ㆍ현대 중고 물품을 수집하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데다, 수집 대상도 예전 미술품과 도자기, 우표, 화폐 일변도에서 벗어나 생활 용품으로까지 폭넓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2년 전부터 희귀 LP 레코드판 수집 붐이 한창 불더니, 지난해초부터는 1960년대산 만화책과 어린이 딱지, 영화 포스터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다.

한 예로 1960년대초 발행된 작가 산호의 ‘라이파이’나 1950년대 말에 제작된 작가 김종례가 그린 ‘엄마 찾아 삼만리’ 같은 만화책은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작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서 낱권이 무려 100만원까지 올라 갔는데도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이런 희귀본 말고도 1960년대에 출간된 만화책들 중 상당수가 10만원이 넘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1920년대에 나온 국내최초의 번안 가요 1호 앨범인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당시 일본에서 500장을 찍었는데 현재 서울대 음대 박물관을 포함해 3~5장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데 시중에서 1,000만원을 호가한다.

1970년대 초반 나온 이화여대 출신의 싱어송 라이터인 방의경 독집도 한 장에 150만원 정도의 가격이 형성돼 있다.

이런 붐에 편승해 골동품 업계에서는 다음에 뜰 품목 미리 선점해 두고자 혈안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품목은 1960~70년대의 영화 포스터와 리플렛, 어린이 딱지,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이발소 사진, 오래된 집의 문짝 등이다.

이런 것들 중 귀하다 싶은 것은 지금도 수십만원을 호가한다. 때문에 많은 고물 수집상들이 너도나도 시골에 있는 고물상이나 고가(古家), 폐가 등을 뒤지며 돈이 될 만한 중고품들을 싹쓸이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중고품들, 없애서 못팔아요”

일부 수집가들은 베트남이나 중국 대만 동남아 각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수집한다. 한 때 처치 곤란으로 여겨졌던 중고품들이 이제 없어서 못파는 소중한 물건으로 대접 받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근ㆍ현대의 생활ㆍ문화 예술품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지게 된 데는 1997년말 IMF 외환 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옛 것’ 보다는 무엇이든 새로운 ‘최신 제품’을 선호하던 분위기가 ‘해방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 불린 IMF 사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패션, 드라마, 만화, 심지어는 과자나 음식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서 복고 바람이 몰아쳤다. 위기 상황이 어려웠던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것이다.

또 21세기라는 새 밀레니엄 시대의 출범도 근ㆍ현대 물품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 비록 해가 바뀐 것에 불과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되면서 ‘19xx년 산(産)’이라는 것을 종전과 다른 정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 인터넷의 보급은 결정적인 파급 효과를 일으켰다. 예전에는 오프라인 경매를 통해 일부 마니아들에 국한돼 일부 거래됐던 것이 이제는 사이버 상으로 범위를 넓히면서 일반인들까지 대폭 참여하게 된 것이다.

수집 대상도 고미술이나 도자기 같은 인기 품목 뿐 아니라 일상 생활용품까지로 확대됐다. 주변의 오래된 중고 물품이 이제 문화ㆍ예술 작품으로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일반인들이 경쟁적으로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 물건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모 인터넷 경매 사이트의 경우 2000년 일주일에 500여종에 불과했던 경매 물건이 요즘에는 개인 회원들의 물건 출시로 일주일에 3,500여종으로 급증했다.

경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근대화 이후 우리 사회는 ‘성장 제일주의’에 사로잡혀 예스런 문화 예술품이나 생활 용품에 대한 수집ㆍ보존 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 외국에 비해 불과 20~30년 된 물건도 찾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일부에서 과열의 조짐이 보이긴 하지만 최근 놀랍게 급증하는 근ㆍ현대문화 예술품 수집 열기는 우리 고유한 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홍보한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1/23 10:27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