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G 쫓던 정부 지붕만…

현대투신 매각협상 결렬, 원칙없는 전략으로 덤비다 '뒤통수'

정부와 AIG컨소시엄이 2년 가까이 벌여오던 현대투신 매각협상이 18일 결렬됐다.

타결이 임박한 것으로까지 알려졌던 매각협상이 우발채무(偶發債務ㆍcontingentliability)를 어느 쪽이 책임지느냐는 문제에 부딪쳐 좌초한 것이다.

이번 결렬은 대우자동차 하이닉스반도체 한보철강 서울은행 대한생명 등 현재 진행중인 다른 매각협상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으며, 말 많고 탈 많던 정부 주도의 매각 협상에 대한 비판론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선진화 대형화를 위한 증권사 구조조정은 난관에 봉착하게 됐고, 회복 조짐을 보이던 거시경제도 부실금융기관 처리지연이라는 덫에서 당분간 헤어나오기 어렵게 됐다.


우발채무에 대한 손실보전 문제로 좌초

결렬의 직접적인 이유는 우발채무에 대한 이견이었다. 정부와 AIG측은 “현대투신의 우발채무에 대한 손실보전(indemnification)을 놓고 막판 줄다리기를 벌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해 결별을 선언하게 됐다”고 밝혔다.

우발채무란 무엇인가. 법률소송 등 우발적으로 발생해 예상하기 힘든, 갚아야 할 돈을 뜻한다. 예를 들면 담배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거액의 피해배상소송을 제기해 승소할 경우 담배회사가 지불해야 하는 막대한 돈이 바로 우발채무이다.

제일은행 매각협상에서 뉴브리지가 요구했던 풋백옵션은 자산가치 하락시 그 차액을 보상해준다는 점에서 우발채무와 성격이 다르다.

생경하기 짝이 없고, 우리나라에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우발채무란 것이 난데없이 등장해 왜 결정적인 걸림돌이 됐으며, AIG는 국제적인 신인도 하락과 그 동안 투입한 거금을 날려야 하는 불이익까지 감수하려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AIG 본사가 있는 미국의 최근 경영 및 회계 풍토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미국식 기업경영의 기본은 회계이며 회계는 경영의 언어로 불린다. 특히 현대투신 매각 같은 기업흥정시 회계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며 변호사의 법률적인 자문은 부수적인 업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고도의 전문직이 대부분 그렇듯이 회계관련규정을 공인회계사 단체들이 거의 전적으로 주도해 만들고 있다. 미국 회계기준위원회(FASB)와 미국 공인회계사 협회(AICPA)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양 기관이최근 집중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새로운 회계 지침은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회계사의 윤리의무 강화, 취득가로 장부에 반영(원가주의)하던 유가증권을 시가로 반영하는 방법(시가주의), 출자 관계가 있는 기업들의 경영적 관련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연결재무제표 작성법, 우발채무 반영방법등이다.

특히 우발채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을 경우 투자자들이 소송을 걸어 기업은 물론 회계법인까지한방에 망하게 할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어 핫이슈로 꼽힌다. 한창 쏟아져 나오고 있는 윤리규정도 우발채무를 더욱 엄격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인수협상서 발 빼려는 전략 가능성도

우발채무 처리와 관련한 대원칙은 보수주의로 우발채무를 적극적으로 반영해 회사의 실적을 최대한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우발채무를 미리 알려 투자자의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송을 예로 들면 회사가 패소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probable)패소판결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도 진짜 손해를 본 것처럼 부채로 반영해 회사의 이익을 삭감시킨다.

심지어 패소할지 승소할지 모르는 상태라 해도 패소할 경우 발생할 비용을 주석 사항으로 표기해야 한다.

AIG가 왜 우발채무 문제를 제기해 정부에 떠넘기려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미국에서 담배회사와 일반 제조업체 등을 대상으로 봇물을 이루던 소송이 최근 투자회사로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 AIG에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뒤집어 이야기 하면 AIG가 거액을 투입한 실사작업 등을 벌이면서 현대투신 인수와 관련한 소송이 제기될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된다.

우발채무의 가능성을 알고도 재무제표에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것은 AIG를 포함한 미국기업의 입장에선 목숨을 거는 것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IG가 우발채무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사실은 앞으로 예상되는 다른 외국기업과의 현대투신매각 협상에 상당한 부담이 될 공산이 있다.

AIG와 정부의 인식차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AIG와 공동출자해 추가부채는 정부가 보유할 지분(45%) 정도만 책임을 진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AIG는 현대투신을 정부로부터 사들인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일부에선 AIG가 지난해 911 미국테러사태로 큰 손실을 입게 되자 현대투신 인수 협상에서 발을 빼기 위해 한국정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사항을 내걸어 이를 빌미로 협상 자체를 무산시킨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정부는 '현대투신증권과 현대투신운용의 미래에 발생 가능한 추가 손실(우발채무)에 대한 정부의완전보장 등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요구해왔다'며 결렬의 책임을 AIG측에 돌렸다.

정부 입장에서는 제일은행 매각과정에서 추가 손실보전 요구를 수용,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부었다는 비난을 감수했던 전력이 있었던 탓에 AIG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수 있다.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의 “결렬선언은 손해보는 매각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또 드러난 정부의 협상력 부재

그러나 AIG의 ‘기발한’ 요구보다 오히려 정부의 협상력 부재가 매각협상을 꼬이게 했다는 지적도 많다. 현대투신이란 ‘상품’을 속전속결로 처분하는것이 이익인지, 적당히 시간을 끌며 키워서 팔아야 이익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도 없이 질질 끌려 다니다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8월 AIG측이 현대증권 신주 인수가를 8,940원에서 7,000원으로 깎아주지 않을 경우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당시 정부는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보름만에 두손을 들고 말았다.

이번 결렬과정에서도 정부는 AIG가 1월16일 보낸 온 최후통첩에 대해 “지금까지 일곱번이나 최후통첩을 했다. 이번에도 그런 차원일 것이다. 그 동안 쓴 돈이 아까워 쉽게 물러나지 못할 것”이라고 예단했다.

또한 이 금감위원장은 지난해 초부터 여려 차례 “곧 협상이 마무리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론을무마하기 위한 공언이었겠지만 이 같은 정부 당국자의 공언은 협상에서 제살을 깎아먹는 자충수로 작용했다.

가뜩이나 싸게 사고 싶어 하는 구매자(AIG)입장에선 값을 더 후려칠 수 있는 호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공직자의 이 같은 ‘무뇌아적 발언’은 대우자동차 등 다른 매각협상에서도 결정적인 걸림돌로작용해왔다.

그렇다고 매각협상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유수의 금융그룹 두 곳이 인수의사를 밝히고 있고 윌버 로스 회장도 AIG를 대체할 다른 투자자를 찾아 협상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어 현대투신 인수협상은 3파전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의 ‘패’가 이미 다 노출된 데다 협상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부담까지 작용하고 있어 새로운 매각협상은 상당히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증시가 전반적인 상승세를 타고 있어 정부의 협상력 제고에 상당한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2/01/2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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