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대한은퇴자협회 주명룡 회장

"인생에 은퇴란 없습니다"

일단, 출발은 순조롭다. '혹시 딴 욕심이 있는게 아닌가'란 '정치적인'질문까지 날아들만큼 기대 이상 화려한 시작이다. 15일 각계의 뜨거운 관심속에 창립식을 가진 대한은퇴자협회(KARP) 주명룡(57)회장.

국내 장년층은 물론 미국은퇴자협회 회장까지 내한해 힘을 북돋워주고 갔다. 지금 왜 '장년'인가. 주 회장은 왜 새삼 장년을 말하고 있는가. 풀 죽은 장년들의 선봉에서 그가 깃발을 들었다.

“은퇴자협회란 말은 오히려 역설적인 뜻에서 붙였습니다. 인생에 은퇴란 없습니다. 단지 한 단막이 끝나고 다음 막이 펼쳐지는 것 뿐입니다.”


뉴욕한인회장 출신, 미국생활 접고 영구귀국

열심히 살았다. 너무 열심히 살았기에 '이제 손을 떼라'고 강요하는 사회가 그와 장년세대에겐 억울하다. 은퇴자협회는 단순히 인생상담이나 하자고 만든 단체도 아니다.

기업과 정부를 통해 관련 제도를 개선하고, 회원 개개인에게도 재취업이나 창업 정보를 제공하는 등,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창구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주 회장은 20여년 미국생활을 접고 지난해 11월에 영구 귀국, '일을 벌렸다'.

“고국에 돌아와보니 만나는 친구들마다 왜 그리 나이보다 더 겉늙고 힘이 빠져있는지 안타까왔습니다. 이전에도 미국내 KARP 활동이 잠깐 보도된후 한국으로부터 수많은 분들의 e메일을 받았는데, 그중 약 40%가 '한국에 오거든 내가 창업하는 것 좀 도와달라' '취업을 알선해 줄 수 없느냐'는 등의 내용이라 의아했었습니다.

그런데 와보니 왜 그런가 이해가 되더군요. 이건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입니다. 아직도 충분한 능력과 축적된 지식이있는데, 어떻게 퇴물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엔 우리 한국사회에서 제일 천덕꾸러기가 장년인것 같습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창립식 현장에서만 400여명이 가입을 신청, 발명가협회등 비롯해 곳곳에서 대단위 회원 단체들이 가입의사를 밝히는 등 시작부터 불같은 호응을 끌어냈다. 이같은 추세라면 올 봄쯤엔 회원수가 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주 회장은 예상하고 있다.

식품업으로 성공한 재미사업가이자 전 뉴욕한인회장 출신,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사실상 쉽지 않았다. 열심히 산 보상이 단순히 휴식에 있다면, 그는 누구 못지않게 안락을 즐겨야 할 사람이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다니던 대학도 중퇴했다. 사실상 고졸 학력으로 대한항공(KAL) 입사시험에 '겁 없이' 지원, 원칙대로라면 재고의 여지없이 탈락될 자격임을 알면서도 입사지원서한켠에 '사장님께'로 시작되는 호소의 편지를 빽빽히 적어넣었다.

요컨대, 떨어질때 떨어지더라도 응시할 자격이라도 허락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도전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엔, 너무도 용감한 청년. 얼마뒤 회사측으로부터 이례적인 응시자격을 부여받았고, 최악의 취업난이 엄습했던 1972년 당시 24명 채용에 1만여명이 몰려든 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해 미국에 건너가기 전까지 약 9년간 국제선 사무장으로 근무했다.

“그대로 계속 일했다면 별사고가 없는 한, 올해가 딱 제가 정년퇴직할 나이입니다. 국제선을 타고 마음껏 외국을 오가는 생활은 참으로 좋았지만, 그러나 마냥 '오늘은 파리, 내일은 LA'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81년 사표를 내고 처음엔 잠깐 미국에서 배우고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떠났었습니다.”

과감히 선택한 도미길. 애초 계획은 평소 눈여겨 봐 두었던 미국내 한 치킨프랜차이즈 사업을 국내에 들여와 사업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차질이 빚어졌다. 실질적으로 소요되는 자본과 장비는 예상을 훨씬 웃돌았고, 함께 동업하기로 했던 사람마저 아직 시기상조라며 빠지는 바람에 모든 일이 무산됐다. 짧은 체류로 끝내려던 미국행은 본의아니게 기나긴 이민생활로 이어졌다.

막막한 오지에 내던져진 기분. 2년이란 시간이 금새 지나갔다. 가져간 돈도 서서히 바닥나고, 아무런 방향도 잡지 못한 채 거리에서 남몰래 눈물을 쏟기도 했다.

어느 밤 옆에서 자던 아내가 갑자기 근육경련을 일으켜 알고보니 힘든 남편이 안스러워 몰래 봉제공장에 취직해 다니고 있었다.

현지의 사업가들을 수백명이나 만나 자문을 얻은 끝에 그나마 목표로 설정한 맥도날드 분점 운영은 뜨내기 이민자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본사에서 요구하는 제출서류를 쓰려고 보니 장장 6페이지나 되는 신청서중 어느 한 줄도 채울 것이 없었다.

대신, 컬럼비아대 옆에서 식품상을 하는 유태인 주인과 인연을 맺게 돼 그들을 돕다가 1년뒤 가게를 인수하게 됐다. 새벽 6시부터 저녁 7시 폐점때까지 하루 13시간을 쉴새없이 일했다. 흔히 '델리가게'라고 칭하는 고급식품점, 안정적인 매출을 기록했고, 13년간 그의 가족을 지탱해준 뿌리가 되었다.


전쟁처럼 살아온 20년 세월

가게를 운영한지 7년후쯤 다시 맥도날드 분점에 도전했다. 그간의 사업경험과 실적에 힘입어 본사에선 한국인 최초로 운영권을 내주는, 파격적인 기회였지만 그것이 일종의 '테스트'였다는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95년 맨하탄 동쪽의 가게로부터 시작해 총 3개 지점을 확보하기까지 매일매일을 전쟁처럼 살았다.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판매액 1달러에 6센트마진이 떨어지는 박리다매형 사업, 그것도 미국의 한복판, 미국인 소비자들을 상대하다보니 안팎으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2000년 6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에 그의 입지전적인 경영 성공담이 커다랗게 실리기까지, 그의 삶 역시 이름없는 독립군이었던 그의 선친처럼 힘겹고 고생스런 삽화들로 채워져있다.

“제가 받은 차별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겁니다. 말로는 잘 한다 잘 한다 칭찬하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없었습니다. 운영권을 얻는데도 같은 미국인들보다 더 시간을 끌어, 두배나 더 많은 실적이 있고서야 겨우 이뤄졌습니다. 지금도 현지 교민들은어려운 현실속에서도 참 열심히 살고 있는 겁니다.”

동종업계의 한인동료들 사이에서 수시로 비보가 잇따랐다. 강도로부터 총격을 받거나 털리는 등, 속수무책으로 위험과 차별에 노출된 처지였다.

맨처음 3인 조직으로부터 시작한 자구적 활동은 점차 영역이 확대되면서 90년엔 뉴욕한인식품협회장으로, 94년엔 뉴욕한인회장으로까지 선출돼 교민들의 방어벽 역할을 맡게 되었다.

나이는 진작에 잊었다. 고국에서 못다한 향학의 꿈을 풀기위해 미국에서 대학과정을 다시 시작, 96년엔 아들뻘의 동급생과 어깨를 견주는 50대의 대학원생이었다.

그간 단체학, 조직 통솔학, 마케팅, 국제금융학 등 많은 공부를 거쳤고, 지금도 '학구적인' 면모가 다분한, 도전적인 장년이다.

치열한 40대후 찾아온 50대의 넉넉함. 경제적인 안정과 명예 등 어느것도 더이상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골프를 즐기고 친구들과 한가롭게 소일하는 생활은 그가 생각해 온 장년기의 자화상이 아니었다. 6년전엔 그렇게 좋아하던 골프도 완전히 중단해버렸다. 더 이상 사회에서 불러주지 않는 나이, 장년의 상실감과 혼란은 바로 자신의 문제였다.

미국은퇴자협회(AARP)가 그에게 해답을 던져주었다. 54년 역사를 가진 AARP는 현재 미국내 50개주에 각 지부를 두고 회원 3,500만명, 직원만 1,800여명에 이르는 거대조직으로 UN에 등록된 국제적 NGO다. 이곳에선 장년의 인력과 지식이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협회가 중간자적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재정적으로도 회원들의 회비수입뿐만 아니라 장년층 관련 기업들간에 '인증마크'처럼 AARP가 브랜드화되어 쓰이면서 장외 수익이 발생, NGO로선 보기드물게 탄탄한 흑자살림을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확보된 수익은 조직을 움직이는 동력뿐 아니라 회원 개개인에게 제공되는 정보의 양과 질 등에 충실히 투입돼 유ㆍ무형의 형태로 다시 회원들에게 환원되고 있었다. 역시 UN 등록 NGO로 출발한 KARP가 걸어갈 방향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약 7년간의 자료수집과 함께 수시로 AARP와 접촉, 1996년부터 뜻을 함께하는 교민들을 모아 소박하나마 뉴욕내에서 KARP를 창립했다. 처음엔 사무실도 없어 자신의 맥도날드 가게 한켠에서 모임을 갖다가 이후 주위의 도움으로 사무실을 지원받아 몇차례 옮겨다니기도 했다.

소수민족으로서의 활동상 한계, 고국에 대한 애착과 향수가 뒤섞인 채 점점한국에서의 활동으로 꿈이 옮아갔다.

특히 97년말 한국으로부터 전해오는 IMF후 강제 퇴직자들의 소식은 그의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주위에선 염려와 만류뿐이었다. 누구보다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아내마저도 한때 그렇게 말했었다. '당신 생각이 아무리 순수하고 훌륭한 것이라 해도 사람들은 당신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장년의 삶은 ‘인생의 3막’ 시작일 뿐”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보다 역이민에 대한 스스로의 두려움이었다. 본래 작년 6월에 오려했던 걸음이 이만큼이나 늦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창립식 행사가 있었던 프레스센터 홀은 이미 7개월전에도 예약을 한 바 있다. 희망과 망설임이 되풀이되던 2001년 연말, 해를 넘기면 영영 떠나지 못할 거란 생각에 불쑥 용기를 냈다. 서둘러 귀국짐을 꾸린후 고국으로 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인생으로 보자면 제 3막의 시작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했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중엔 타고난 본능중 자기 성취욕이 유난히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제가 그런 부류중 하나인 것같습니다.”

서울 마포구에 협회 사무실을 두었다. 상근 직원 9명. 그러나 앞으로 할일에 비하면 아직도 태부족한 인력이다. 정책적인 문제를 포함해 회원들을 위한 복지, 취업, 생활 정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인력이 필요하고, 현재도 모집중이다.

회원의 회비는 1년에 3만원, 현재 소요되는 조직 운영비는 이사진의 도움으로 충당되고 있다. 앞으로의 진로도 이미 확고히 정비돼 있다. 2월중 장년문제에 관한 심포지엄을 비롯해 워크샵과 대규모 야외행사 등 순차별로 계획이 서 있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겠느냐'는 협회의 모토는 바로 자신에게 끝없이 던졌던 물음, 그 쓸쓸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질문을 이제 주 회장은 장년 동지들에게 힘차게 건네고 있다.

“무엇보다 장년 스스로가 덤으로 산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봉사받기만을 바라지 말고 지식이면 지식, 돈이면 돈,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시 사회에 봉사하며 환원하는 삶을 생각해야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행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무대 뒷편에 물러나야 할 은퇴자가 아니라 여전히 무대 앞에 서야 할 주인공입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최규성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2/01/23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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