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한·일 국경은 없다

촬영지·아이디어 공유 등 '국경허물기' 범위 확대

한국영화? 일본영화? 외피만으로는 국적을 짐작할 수 없는 영화들이 2002년 상반기 국내영화시장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ㆍ일 영화계의 국경허물기는 5월 2002한일 월드컵축구대회공동개최를 계기로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15일 서울 센트럴6시네마에서 특별시사회를 가진 일본영화 ‘서울’(감독 나가사와 마사히코). 한국에서는 3월에 개봉할 예정이지만, 일본 개봉(2월9일)을 앞두고 이례적으로 한국 영화팬에 작품을 공개했다.

서울에서 일어난 연쇄현금강탈사건을 한국의 베테랑 형사와 일본의 신참 형사가 함께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액션영화다.

서울에서 100% 로케이션 촬영하고 최민수 김지연 등 출연진 대부분이 한국배우이며 일본배우는 나가세 토모야(그룹 ‘토키오’의 보컬) 단 한 명 뿐이다.

‘쉬리’의 무술감독 정두홍과 특수효과담당 정도안이 참여해 한국적 액션이 강한 작품이다. 그러나 엔진네트워크 등 일본의 영화사들이 ‘서울’ 제작위원회를 구성해 만든 일본영화다.


과거사 문제 등 민감한 소재도 다뤄

일본영화에 우리의 배우와 도시가 등장하고 우리 영화에 일본배우가 등장하는 일이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다. 완성작을 수출하는 형식의 일방적 교류에서 자본, 배우 및 스태프, 촬영현장이나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교류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심지어 식민통치처럼 한일과거사에서 서로 언급조차 꺼리는 민감한 소재도 채택하고 있다.

튜브엔터테인먼트의 ‘2009 로스트메모리즈’(감독 이시명)는 대동아공영권이 실현된 후 100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라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장동건과 나카무라토오루가 주연했고, 2월1일 개봉할 예정이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소재로 한 ‘K.T’(감독 사마모토 준지)는 재일동포 이봉우씨가 운영하는 씨네콰논사와 한국의 본엔터테인먼트가 합작투자했다.

김갑수 주연으로 5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개봉할 계획이다.

드라마 ‘태조왕건’의 작가 이환경씨가 시나리오를 쓴 ‘싸울아비’(감독 문종금)는 일본 큐슈 지방에서 80% 촬영한 우리 영화.

2월말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개봉할 예정으로, 백제 멸망직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유민과 무사들의 갈등을 그려냈다.

2차 대전 당시 가미카제로 죽은 한국인 병사의 이야기를 다룬 일본영화 ‘호타루’(감독 후루야타 야스오)는18일 개봉했다. 주요 등장인물이 한국인으로 설정돼있고, 마지막 20분은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 로케이션했다.

‘국제영화제 수상작이 아닌 18세이상 관람가 일본 극영화의 개봉 금지’로 국내에 들어오지 못한 일본영화도 많지만, 국내에 소개된 일본영화나 한일합작영화의 흥행성적도 기대이하였다.

특히 2001년 한국의 영화관객수(서울관객기준,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 조사)가 전년대비 28.4%가 늘었음에도 일본영화의 흥행성적은 저조했다.

2001년 한 해 동안 국내에 들어온 일본영화는 ‘간장선생’ ‘쥬바쿠’ ‘바람계속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등 24편으로, 국내개봉영화 263편의 9.1%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웃집 토토로’의 서울관객 12만8,900명 등, 24편의 일본영화가 서울에서 동원한 관객수는 48만5,688명으로 관객점유율은 불과 1.4%였다. 전년 대비 76%이나 하락했다. 수치만 보면 일본영화의 한국 공략은 실패다.

반면 ‘쉬리’나 ‘공동경비구역JSA’가 각각 2000년, 2001년 일본에 소개돼 성공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일본의 관심과 신뢰는 높아졌다.

영화 창작에서의 일본과 한국의 격차가 줄어들면서 서로 제작파트너로 삼기에 손색이 없어진 것이다.

특별시사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서울’의 나가사와 마사히코 감독은 한국의 스태프와 공동작업하게된 배경에 대해서 “한국이 액션영화의 테크닉 등에 있어서 일본보다 앞서있기 때문에 액션이나 특수효과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고 밝혔다.

합작이나 인적 교류를 매개로, 상대국가의 영화 시장 진입장벽을 뚫기 쉽다는 이점은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2001년 말 일본과 한국에서 거의 동시에 관객에게 선보인 ‘고’(감독 유키사다이사오)도 한국의 스타맥스와 일본의 도에이사가 기획부터 공동으로 한 합작영화. 재일동포 3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경쾌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명계남 김민 등 한국배우가 카메오 출연했다.

덕분에 ‘한국에서 제작비 20%이상 투자, 주연 혹은 조연급 배우 중 1명 이상이 한국인이거나 감독이 한국인이어야 한다’는 문화관광부의 한국영화 기준에 들어 맞아 국내개봉시 한국영화로 분류될 수 있었다.


문화적 거리감 좁혀가는 아직 미흡

아직도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남아있고 한국과 일본의 왜곡된 과거사의 매듭을 풀리지 않았다. 영화에서 한국 혹은 일본이라는 국적을 불분명하게 함으로써, 골깊은 한일간의 정서적 반감을 최소화할 수도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 백제유민의 일본 정착, 2차세계대전 당시 한국인 강제징용 등 직접적으로 거론하기 힘든 과거사를 간접적으로 논하는 장이 될 가능성에 대한 기대 정도는 해볼 수 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배려가 오히려 상대에 대한 오해를 낳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인의 시각에서 본 일본문화이고 일본인의 시각에서 본 한국문화이기에, 서로에 대한 선입견이 작품에 배어들어있다.

‘서울’에서는 한국인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예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시나리오를 담당한 하세가와 야스오가 일본인의 시각에서 한국을 보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문화적 간극 해소는 아직 미완이다. 그러나 한일 정서적 거리 좁히기라는 대의보다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서라도 한일간의 스크린 공유는 확산될 것 같다.

문향란 문화과학부기자

입력시간 2002/01/23 19:16


문향란 문화과학부 iam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