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요리사가 된 도예가 최병진

"한평짜리 내 세상에서 작품하듯 요리합니다"

서울 한복판의 미로, 종로 피맛골 먹자골목을 뒤진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레스토랑. '종로1평'. 이 손바닥만한 가게의 주인은 최병진(47)씨다.

손님 두세명만 들어와도 가게가 꽉 찬다. 너무 작아서 수시로 '좌석 매진' 사례다. 잠시 기다렸다 들어갈래도 마땅히서서 기다릴 공간조차 없다. 그리 크지도 않은 냉장고마저 가게밖 골목으로 나와 떨고선 상황이니 오죽하랴.

"죄송하지요, 그래도 저를 찾아주신 손님인데 워낙 자리가 협소해 그냥 돌려보낼때는 저도 저지만, 손님께 미안해지죠. 한두번 와 본 손님은 그래서 주로 예약을 합니다. "

이곳은 스파게티 전문점이다. 최씨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내 온다. 스파게티의 본고장 이태리에서 배워온 솜씨다. 메뉴는 8가지. 8,000원짜리 갑오징어 먹물 스파게티 등이 여기선 최고가다.

가게는 허름해도, 맛은 꽤 인기가 있다. 주인이 심심치않을만큼 종일 손님이 이어진다. 오는대로 다 받을수만 있다면 수입도 꽤 늘겠건만, 작은 것이 한계다. 한평짜리 레스토랑의 비애다.

도망갈 데가 없던 폭염천하 여름보다는 이 겨울이 낫다. 문을 연지 7개월째, 장사 초보 최씨에겐 첫번째 맞는 겨울이다. 온수가 나오지 않아 찬물만 만지다보니 남자 손이 더 엉망이다. 접시가 10여개, 국자 3개, 조리팬 2개, 새벽 찬바람부터 나와 저녁 8시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그의 세상은 한평이 전부다.

아침에 장만해둔 국수 30뭉치가 다 팔려나가면 그날 장사는 완벽한 셈이다. 얼마전엔 며칠간 지독한 몸살과 기관지염으로 부득이 문을닫기도 했다. 아직도 이 고생에 숙달되지 않은 탓이다.

아무리 엄동설한이라도 가게앞 비닐 막과 실내의 원적외선 열풍기 하나외엔 따로 난방시설도 없다.그래도 웬만해선 추위를 모른다. 요리 자체가 난방이기도 하고, 손님들과의 인정으로도 훈기가 돈다.


대학서 도예 가르치다 짐싸들고 이민

때론 그를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좀 까마득한 얘기이긴 하지만, 그는 실제로 대학에서 도예를 가르치던 교수였다. 전시회를 가진 적도 여러번, 대학강단을 지키다말고 갑자기 사표를 낸 뒤 이민을 떠났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부터 앞치마를 둘렀다. 요리사 자격증까지 딴 뒤 몇몇 식당까지 거쳐 마침내 이 가게에 착륙했다. 바깥에선 요리사에서 교수로 변신해 박수를 받는 이도 있다지만, 그는 어째 거꾸로다.

"재미있게 살고 싶습니다. 도예를 그만둔 것도 아니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더 마음껏 하기 위해 생업을 따로 찾은 겁니다. "

1976년 홍익대 미대 응용미술학과에 입학, 도예를 전공했다. 1987년부터 약 9년간 충남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계룡산 부근에 작업장도 짓고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배우고 싶은 것은 '위신'을 가리지 않고 좇아갔던 이력이 그때부터 있었다.

큰 작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옹기 제작법을 배우겠다며 직접 옹기 만드는 공장에 취직, 장작을 나르고, 잔심부름도 하며 옹기를 구웠다. 월급도 받지 않는 처지였다.

어느날 학교를 그만두고 갑자기 이민을 가겠다고 나섰다. 어렵게 다져놓은 터를 버리고 떠나는 그에 대해 주윗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씩씩하게 사표를 내고, '가방 하나 달랑 싸들고' 호기롭게 뉴질랜드로 떠난 그의 이민 이유는, 너무 간단해서 믿기지 않는다.

"한국이 싫어지기라도 하셨나요? 떠나고 싶게 만든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

"아뇨. 그냥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어서요. "

"재미도 좋지만, 그보다는 불안감이 더 크쟎아요. "

"가서 어떻게 될지,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까 더 해 볼 만 한거지요. 가르치는 일도 10년 가까이 했으니 그 정도면 할만큼 했다고 생각했구요. "

그때도 그는 여전히 도예가였다. 뉴질랜드내 한국신문사에서 운영하는 도예 강습반을 맡아 지도했고, 직접 생활 도자기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큰 벌이가 된 것 같지는 않다.

"한계가 있더라구요. 제가 산 곳이 뉴질랜드에서도 가장 큰 도시인 오클랜드인데, 인구가 120만명 정도로 우리 대전 정도밖에 안되다보니 시장이 작아 별로 전망이 없었습니다. "

그 수입으론 도자기 제작비를 대기도 부족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 삼아 나선 곳이 일식당, 오전엔 도예강습을 하고, 오후 3시부터는 식당에 나가 설겆이부터 시작해 초밥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나마 초보생치고는 손이 빠른 편이라 빨리 일을 익혔고 나중엔 초밥 30가지까지 터득했다.

2년여 지났을때 갑자기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둘러 보따리를 정리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2000년 2월. 노환으로 앓고 있던 어머니는 결국그 해 가을 세상을 떠났다.


작가적 자존심 지키기 위해 요리사의 길로

돌아온 뒤에도 한참동안 도예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겉으론 '재미'를 외치지만, 도예가로서의 최씨는 사실상 진지하고 복잡한 작가다. 주로 다루는 주제부터가 '삶과 죽음'에 대한 것들이다.

현재도 예술의 전당에 가면 그가 이민 직전 맡겨두고 간, 10여개의 관을 붙여놓은 대형 설치작품이 보관돼 있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작가 최씨,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사실상 자신의 작가적 자존심을 지키려고 찾아낸 탈출구이기도 하다.

"도예를 하면서 생활을 유지하려면 도자기를 제조업처럼 만들어파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그게 싫었습니다. 차라리 돈은 다른 일을 통해 벌더라도 만들고 싶은 작품만큼은 그것이 찌그러지든, 팔리든 안 팔리든, 내 마음껏 자유롭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 일이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 당장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어느정도 안정되고 나면 원래의 생각대로 다시 도예작업을 시작할 겁니다. "

뉴질랜드에서의 경험 이후 요리는 그에게 또다른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온 얼마뒤부터 요리학원에 다녔다.

일식, 양식 요리사 자격증을 땄고, 한때 일식집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끄는 것은 이태리 음식이었다.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음식일뿐 아니라, 나날이 외식이 느는 요즘 한번 투자해 봄직한 사업 종목이라 생각했다.

어느 신문에 실린 소개 기사를 보고 직접 이태리 톨레도 요리학교까지 찾아가 교육도 받았다. 이곳은 6개월 과정의 요리사 양성소로, 2개월은 학교에서, 나머지 4개월은 실제 레스토랑에 나가 현장실습을 하며 훈련을 하게 돼 있었다.

최씨 역시 나중엔 현지의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식당에 딸린방에서 먹고 자며 아침부터 밤까지 주방을 지켰다. 체력부터 녹초가 되는, 만만찮은 고생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뒤 국내 레스토랑에 이력서를 내밀어 보았지만 아무도 이 '40대 신참'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월급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겨우 기회를 허락받아 실전을 쌓았다.

"이력서에 학교에 재직했던 것도 적었냐구요? 아뇨, 전혀. 상관도 없는 일인데 그걸 뭐하러 적어요? 더구나 안그래도 나이때문에 거절을 당하는 판인데 그것까지 적으면 당연히 완전거절이지요."

이태리식 피자를 만드는 전라도 광주의 음식점에도 있었고, 서울에선 한 호텔 조리사 출신의 요리사와 함께 북한산 주변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독특한 메뉴를 개발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의 음식이 호텔식과 비슷하다는 평이 들리는 것도 그때의 영향일 것이다.

"그 호텔출신 주방장이 안 나올땐 제가 주방을 맡았는데, 하필 그런날은 손님이 왕창 몰려드는 날입니다. 그럴땐 너무 주문이 많아 나중엔 어느 음식을 먼저 내야되는지 순서를 까먹어 혼이 나기도 하고,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만들다보니 버터올려놓은 것도 깜빡해 태우기도 하고, 실수가 많았죠. "

작년 7월말,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꾸몄다. 원래는 인근에 있는 다른 가게를 희망했지만, 그일이 어긋나면서 차라리 작디 작은 현재의 가게를 택했다. 보기엔 초라해도 당당한 그의 영토다.

개업과 함께 맞은 숨막히는 더위는 처음부터 '뜨거운 현실'을 맛보게 했지만 서서히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찾아들었고, 그 손님들 덕에 7개월을 힘차게 끌어왔다.


맛있게 먹는 모습보며 행복감에 젖는 일상

"점심때부터 저녁 문닫을때까지 정말 한번도 안 쉬고 계속 손님을 받아 본 적도 있습니다. 사실 여기선 돈보다는 그냥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걸로 만족을 느낍니다."

벌써 3년째 흙 한번 못 만져봤다. 원래 요리로 돈을 벌어 도예에 투자하겠다고 시작한 일, 어찌보면 주객이 전도된 듯한 오늘이지만, 그래도 조바심은 없다. 하루하루에 조급한 그라면 애초에 학교를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도 도예를 공부하는 후배가 찾아왔었습니다만, 당장 제가 그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조급해지진 않습니다.

도예란건 하루 아침에 좋아지고, 하루 아침에 후퇴하는 분야도 아닙니다. 아주 서서히 변하고, 서서히 이뤄지기때문에 언제 어떻게 작업을 다시 시작하든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시회를 위한 전시회는 앞으로 안 하려고 합니다. 보여주기위해 만든 작품들은 아무래도 억지같다는 생각이 옛날부터많았거든요. "

흰 벽이 심심해 그가 직접 그림을 '끌적거려' 놓은 벽면. 그 옆으로는 '돈을 벌더라도 여기를 떠나지마세요'라는 누군가의 부탁도 씌여있다.

하지만, 그 소원은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언젠가 이보다 좀 더 큼직한 가게를 가질 계획이다. 돈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공간을 연출해보고 싶다는 욕심때문이다. 자신의 손으로 꾸민 가게에서 자신이 개발한 메뉴를 다채롭게 선보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시골 바닷가의 식당 주인이 된 그를 만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 뒤꼍엔 도자기 가마까지 지어져있는 아담한 식당에서 주방과 가마를 오가며 도자기도 굽고, 피자랑 스파게티도 만들어주는, 요리하는 도예가 최씨 말이다.

그때도 아마 그는 그렇게 손님들에게 물을 것이다. '먹을만한가요?'

자칭 '사람이 변변찮아서' 지금도 미혼. 그는 '요리도 미술적인 부분이 많다'고 얘기한다. 갖가지 재료의 색감이며 배색, 그리고 창작적인 부분이 그에게 또다른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이런 얘기는 왜 할까? "제 얘기를 너무 자세히 쓰진 말아주세요. 그냥 안개처럼 희미하게 써주세요. " 왜냐고 묻자 '너무 잘 아는 건 재미가 없지 않냐'고 되묻는다. 변사없는 무성영화처럼 삭막한 서울 하늘 아래서, 안개같은 남자의 맛있는 마늘크림소스가 불 위에서 끓고 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최규성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2/01/3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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