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정치시대 "TV가 말해준다"

선거운동의 핵심으로 떠오른 TV토론

1월 21일 오전 11시. 서울 은평구 불광동 한국여성개발원 3층 임원실. 자원봉사 코디네이터 1명과 MBC 소속 분장사 2명이 민주당 김근태 의원 얼굴에 분장을 하고 머리 손질을 하고 있다.

이날 낮 12시 5분에 시작하는 MBC 토론 프로그램 ‘선택 2002, 예비후보에게 듣는다’ 출연을 위한 준비는 이처럼 여느 탤런트와 다를 바 없었다.

대통령선거를 11개월 앞두고 ‘TV 정치’의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18일 SBS의 첫 방송을 시작으로 MBC, YTN 등 지상파 TV와 케이블 TV가 경쟁적으로 대선 경선 후보 주자들을 브라운관으로 불러들이면서 시청자들의 눈길 잡기에 나섰다.

각 방송사는 이미 지난해 선거취재기획단을 발족시켰다. 앞으로 대선은 물론 지방선거 관련 토론회 등 TV 정치는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대규모 군중집회 압도하는 영향력

“TV 미디어 정치는 세계적인 추세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를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제 미디어에서 권력이 나온다는 말이 과장만은 아니다.”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양승찬 교수는 TV 정치의 영향력을 이렇게 진단한다.

TV 정치는 선거법과 방송법 개정으로 선거 관련 방송이 본격화한 1997년 15대 대선 때 막을 올렸다. TV 정치는 길거리 유세와 대규모 군중집회를 일거에 무력화시키며 방송을 선거운동의 핵심으로 부상시켰다.

97년 12월 1일 한나라당 이회창, 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 등 세 대통령 후보가 처음 출연한 TV 토론 직후 한 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TV 정치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응답자 1,000명 가운데 8.1%가 ‘토론방송을 보고 나서 지지 후보를 바꾸었다’고 답했으며, 2.3%는 ‘바꿀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리서치의 15대 대선 후보 지지율 조사 결과 97년 11월 26일 현재 김대중 후보는 32.1%로 이회창 후보의 31.5%보다 불과 0.6% 포인트 앞섰지만 12월 1일 1차 TV 토론 직후에는 김 후보가 32.3%로 이 후보(27.3%)와의 격차를 5% 포인트까지 벌렸다. 놀라운 위력이다.

신한국당 후보 경선 결과에 불복해 탈당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득표율 19.2%를 기록하며 선전한 것도 TV 정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저비용, 고비율의 안방정치

TV 정치는 ‘고비용 저효율의 길거리 정치’를 ‘저비용 고효율의 안방 정치’로 바꾸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권자가 후보자 토론이나 대담 등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 정치에 대한 냉소나 낮은 투표율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도 적지 않다. 후보들을 직접 만날 수 없는 유권자로서는 후보별 정책이나 입장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폐해도 만만치 않다. 방송 학자들은 “TV는 출연 후보의 이미지 창출에 기여할 뿐 정작 유권자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 정치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는 못한다”고 지적한다. 유권자를 이미지의 함정에 빠뜨려 올바른 선택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후보들은 비전과 정책보다는 넥타이나 눈동자의 위치, 외모, 손동작에 이르기까지 연출되는 이미지에 더 신경을 쓴다. “TV 토론이나 선거방송에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관리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SBS와 MBC 토론회에 나온 김근태 의원도 “TV의 속성상 정견과 비전보다는 전달방식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고 털어놓았다.


이미지 '함정'에 빠질 수도

특히 MBC와 SBS의 첫 후보 토론회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정해진 시간과 질문 순서에 따라 각본처럼 진행되는 선거 관련 방송은 후보들에게 정견과 입장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언급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방송사의 불공정성까지 끼여들 소지가 높다.

전북대 언론심리학부 김승수 교수는 “97년 대선 방송의 경우 패널 선정, 방송 횟수, 질문 내용 등 에서 우려할 만한 불공정성이 드러났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방송사가 아닌 민간단체 주도의 독립적인 선거방송위원회를 구성해 불공정성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97년 대선 당시 사회적 대표성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특정 단체가 후보 초청 토론회를 열고 이를 방송 3사가 그대로 중계해 물의를 빚는가 하면 방송사가 사세 과시용으로 무분별하게 토론회를 남발하기도 했다.

SBS 보도제작국 정성환 부장은 “방송사는 불공정 시비를 없애기 위해 방송 횟수에서부터 카메라 앵글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방송하려고 한다”며 “앞으로 더욱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선거방송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배국남 문화과학부기자

입력시간 2002/01/31 19:15


배국남 문화과학부 kn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