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투정과 투쟁 사이에서…

탈당 배수진으로 한나라당 딜레마

한나라당이 박근혜 부총재의 ‘탈당’ 배수진으로 온통 시끄럽다.

주류측은 주류측대로 “박근혜가 그럴 수 있느냐”며 박 부총재의 진의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박 부총재는 연일 이회창 총재를 향해 “정치개혁에 대해 결단을 내려라”며 십자포화를 날리고 있다. 당내에선 “박 부총재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온다.


“이 총재가 정하라” 최후 통첩

주류측과 박부총재의 갈등의 골이 이처럼 깊어진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심지어 “어짜피 예정된 길을 걸어온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일단 박 부총재가 탈당 가능성까지 시사하며 배수진을 치게 된 경위를 간단히 되짚어보자. 한나라당에선 박 부총재의 요구로 공정한 경선 룰을 만들도록 ‘선택 2002 준비위원회’(이하 선준위) 라는 전당대회 준비를 위한 특별기구를 만들었다.

이 기구에 박 부총재는 고집을 부려가며 위원으로 직접 참여했고, 이회창 총재가 미국 방문길에 오른 사이 선준위에선 ‘국민경선제 도입’에 대체적인 합의를 이뤘다.

그런데 이 총재가 귀국한 후인 지난 1일 선준위에서는 “최종적으로 의원과 지구당위원장들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당에 연찬회를 열 것을 요청,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막상 연찬회에서 뚜껑을 열어보니 의원들은 박 부총재가 요구했던 국민경선제와 집단 지도체제 문제에 대해 압도적으로 반대의사가 많았다. 선준위에선 의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까지 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박 부총재는 연찬회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와 기자들을 찾았고 “선준위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어짜피 한나라당의 정치개혁은 이회창 총재가 결단을 내려야할 사안”이라며 이 총재의 최종 결심을 요구했다.

나아가 박부총재는 “이를 거부하면 이 총재도 개혁대상이 될 것” “국민들을 상대로 직접 이야기를 하는 수 밖에 없다” 등등 이 총재와 주류그룹을 향해 기존의 어법을 훨씬 뛰어넘는 강경 발언들을 쏟아냈다.

박 부총재는 “선준위에서 합의한 것을 결국 연찬회를 열어 수의 힘으로 뒤엎으려는 것 아니냐”고 반발했다. 그러나 주류측에선 “연찬회의 토론 내용은 단순한 참고용일 뿐”이라며 “오히려 이 총재는 연찬회의 내용을 보고 받고 일이 이상하게 되어 가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다소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버티고 있는 박 부총재의 속내는 뭘까. ‘국민적 지지’를 유일한 발판으로 삼아온 박 부총재에게 국민경선제 등 일련의 요구들은 ‘정치개혁’이라는 명분 보다도 자신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될 것이라는 현실이더 중요해 보인다.

당원들만의 선거라면 ‘이회창 대세론’을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기존 당원이 아닌 일반 국민들이 참여할 경우에는 전세를 뒤집기는 힘들겠지만 ‘안한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대국민 바람몰이에 한가닥 희망을 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정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결국 국민경선제를 거부하는 주류측의 입장을 박 부총재측은 “앉아서 당하라”는 통첩으로 해석, 경선포기-탈당시사등의 강공으로 맞받아 치고 있는 것이다.


선준위 거부는 탈당 명분 쌓기?

박 부총재는 자신의 입으로 탈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탈당문제에 대해 물으면 “워낙 탈당이라는 말이 따라다녀서 조심스럽다”면서도 “(주류측이) 더 이상의 선택을 할 수 없게 한다”는 간접화법으로 탈당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철저한 NCND(시인도 부인도 하지않는)이다.

비주류측의 한 의원은 “선준위 회의에 참여하면서 박 부총재가 작심하면서 덤벼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면서 “주류쪽에서 수로 밀어붙이면 정말로 당을 나갈 것 같다”고 말했다.

정가에선 결국 박부총재가 선준위 거부- 이총재 결단 촉구- 경선포기선언- 탈당 등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박 부총재가 경선에 참여한다고 해도 대선 이후 그가 당에 발을 붙일 공간이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워낙 주류측과의 갈등의 골이 깊어져 자칫 주류측이 원하든 원치 않든 분위기에서 고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경선 후 2인자 구도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박 부총재가 탈당 결심을 하기도 쉽지 않다. 한나라당을 떠나 마땅히 정착할만한 둥지가 보이지 않는 것. 민주당의 인기가 하한가를 치닫는 상황에서 여권의 문을 두드릴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당장 자민련에선 “박부총재가 탈당하면 영입 0순위”라고 추임새를 넣고 있으나 정치적인 세를 얻기 어렵고 자칫 ‘공화당 부활’의 이미지만 덮어 쓸 수 있다.

결국 TK를 근거로 ‘영남후보’로 추대되는 상황이 마련되어야 하나 한나라당과 맞서 얼마나 파괴력을 가질지는 미지수이다. 자칫 한나라당을 떠났다가 대선 이후 ‘낙동강 오리알’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일종의 ‘정치적 도박’을 해야 하는 셈이다.

결국 박부총재의 NCND는 당내 투쟁을 위한 압박용 카드임과 동시에 탈당명분 축적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전략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박부총재보다 이회창 총재와 한나라당의 주류그룹의 고민이 더 깊어보인다. 박 부총재가 사사건건 이 총재를 물고 늘어지며 ‘개혁 대 반개혁’의 이미지로 전선을 형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주류 그룹에선 “당과 이총재를 매도해 흠집을 내는데 골몰할 수 있는가”라며 “이 총재가 입을 상처가 걱정된다”며 분개하는 분위기이다.

물론 주류 그룹 내부 에서도 박부총재에 대해선 강ㆍ온 두기류로 갈리고 있다. 매파들은 “떠나려면 떠나라. 정리할 것이면 빨리 정리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인 반면 비둘기파는 “그래도 박부총재를 잡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온건파들은 “박 부총재를 당장 내칠 경우 이 총재의 포용력이 다시 도마위에 오를 것”이라며 “가장 좋은 것은 박부총재를 경선 레이스에 끝까지 참여시키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이 총재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명분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총재의 한 핵심측근은 “박 부총재가 변죽을 울리며 명분쌓기를 하지 말고 빨리 하고 싶은데로 하라”며 “어짜피 당을 떨쳐 나가기위해 수순 밟기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심지어 입당 1백일을 맞은 강창희 부총재 조차도“소수의견도 존중되어야 하지만 다수 의견은 더 존중되어야 한다”면서 “다수 의견이 당론을 끌고 나가야지 소수의견에 끌려 다녀선 안된다”고 말했다.


“경선제 수용하면 다른 문제 들고 나올 것”

특히 주류 그룹의 강경파 들은 박 부총재가 “정말 경선할 마음이 있느냐”고 의심을 하고 있다.

한 의원은 “박 부총재가 경선 출마를 했지만 대구지역 의원들과 아직 식사 한 번하지 않았다”면서 “사실상 언론을 상대로 정치를 할뿐 실질적인 경선 준비는 하고 있지 않은 것 아니냐”고 의아해 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국민경선제의 경우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주류측에선 결국 본선을 앞두고 체력을 비축하기는 커녕 예선에서 힘을 다 써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도 국민경선제를 꺼리는 현실적인 이유중의 하나이다.

박근혜 부총재는 “이 총재가 결심하라”고 공을 넘긴 상태. 비주류인 이부영 부총재도 3일 “이 총재쪽에서 국민경선제를 하지 않을 만큼 선거지지도에서 뒤지고 있지 않다”면서 “이 총재쪽에서 대범하고 포용력있게 사태를 처리해달라”고 압박했다. 이 총재의 고민이 커질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이 총재의 한 핵심 측근은 이와 관련 “당장 이 총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면서“의원들의 다수 의견을 뒤엎을 수도, 박 부총재를 내칠 수도 없는 상황인 만큼 이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당돌할 정도로’ 저돌적인 박 부총재의 공세를 받아낼까. 주류 그룹에선 “국민 경선제 요구를 받아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엔 집단 지도체제 문제가 기다리고 있고, 그걸 해결하면 박부총재는 또 다른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라고 보고 있다.

주류 일각에선 “어짜피 박 부총재가 요구하는 것을 100% 들어줘도 대세에 지장이 없는 만큼 본선 경쟁력을 위해선 크게 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정치부 이태희 기자

입력시간 2002/02/06 16:30


정치부 이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