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연두교서로 엔론 케이트 탈출 시도

부시대통령, 백악관 연루설 '희석'노린 강경발언

부시 대통령은 올해 연두교서를 통해 엔론사와 백악관의 연결 관계를 희석시키려 하고 있다. (실제로 부시 대통령은 1월 29일 연두교서를 발표하면서 엔론의 파산을 둘러싼 정경 유착설을 의식한듯 기업 회계의 투명성 제고와 기업 연금 제도 개선을 촉구했으나 자신의 최대 `돈줄' 가운데 하나였던 엔론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다.


부시 행정팀과 연관 속속 드러나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연설문을 뜯어고칠 필요가 있나?.”

지난 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 연설문 내용을 여러 차례 수정하느라 정신이 없던 보좌관들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부시의 이 말은 연설문을 놓고 끙끙 앓다시피 하던 보좌진을 가볍게 놀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번 연두교서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중을 기해서 손을 봐야 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많은 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 경기침체, 불안한 국민, 공격적인 야당,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악관의 해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급진전 되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기업파산 소식들이 그것이다.

지난 주 5일 동안 엔론의 몰락 소식은 단순히 돌발적인 사고에서 출발해 로버트 펜 워렌이나 존 그리샴의 소설 속에서 따온것 같은 치밀하고 화려한 구성으로 발전했다.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은 지난 주 화요일 텍사스주 휴스턴의 엔론 본사에서 폐기된 서류들을 발견했고, 수요일에는 부시대통령이 ‘케니 보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엔론의 CEO인 케네스 레이가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목요일에는 의회조사단의 청문회가 시작됐으며, 금요일에는 지난 5월 엔론사에서 퇴직한 43세의 임원클리포드 백스터가 자신의 벤츠 승용차 안에서 자살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같은 날 백악관은 부시의 정치 자문 칼 로브가 공화당의 주요 컨설턴트를 5년전 엔론에 추천했다는 언론의 보도내용을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이는 엔론과 부시 행정팀의 밀접한 관계를 입증하는 소식이면서, 동시에 영웅주의와 국민화합, 애국심(최근 부시 대통령에게 굉장한 대중적 인기를 안겨준 가치들이기도 하다)을 호소해야 하는 연두교서의 ‘약발’을 떨어뜨릴수 있는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 역시 부시에 대한 지지도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TIME과 CNN이 최근 공동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부시의 지지도는 아직 77%의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부시가 전쟁과 테러위협에 잘 대응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이슈, 즉 국내 경기, 의료 보건, 재정적자등에 대한 부시의 지지도는 중간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45%의 응답자가 현재의 경기침체가 지속될것으로 응답했으며, 51%는 부시 대통령이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펴면서 일반 국민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답했다.


백악관으로 튄 엔론 파산 불똥

불과 2주전, 백악관 공보수석인 에리 플라이셔는 저녁 뉴스를 보면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엔론사 파산 소식을 전하는 모든 TV뉴스는 파산의 이유로 경영 부실을 들었으며, 정치적인 연관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 중순경, 플라이셔와 다른 백악관 수석 비서관들은 엔론사 파산의 불똥이 백악관으로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오판이었다.

지난 한해 동안 부시팀과 엔론은 달콤한 밀월을 즐겼다. 엔론사가 공화당에 2000년 선거 기간에 기부한 돈은 176만달러에 달했고, 부통령 딕 체니는 엔론사의 요구에 부응, 에너지 정책안을 내놓았다.

군사 비서 토마스 화이트에서부터 무역 대표부의 로버트 조리크에 이르기까지 엔론사 출신 간부와 컨설턴트들이 부시 행정부 곳곳에 포진했다.

지난 여름에는 급기야 엔론사 레이 회장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은 패트우드가 행정부내 에너지 가격조정관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지난 가을 엔론사 고위 간부들이 워싱턴 정가에 수많은 요구사항을 내놓았을 때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아무 일도 성사되지 않은 것이다. 수개월간 양측이 긴밀히 오가며 수많은 사안들에 대해 협의를 했으나, 막상 회사가 연방정부를 최후의 보루로 삼게 되자 정부는 쌀쌀하게 등을 돌렸다.

클린턴 행정부 당시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 시티그룹 회장이 엔론사 채권자를 대표해 행정부에 전화를 걸었을 때도 부시 행정부는 냉담했다.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백악관측 항변은 어느 정도 시간을 버는데는 성공했으나 정부회계와 에너지 정책 등에서 발견된 허술함은 의회 조사단을 가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조사 대상으로는 엔론사나 엔론사의 회계를 담당한 아서 앤더슨사로부터 돈을 받은 공화당과 민주당 소속 정치인 수백 명 (청문회에 불려간 248명중 212명을 포함)도 들어있다.

사태가 전개될수록 민주당의 기대도 커졌다. 수개월간 민주당은 아무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전시상태(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 공격)인데다 한창인기를 얻고 있던 지도자(부시)와 뜻을 나란히 하는 정당 혹은 정치인으로 국민에게 비추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내 재정 악화를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오사마 빈 라덴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한 당시의 민심도 상당부분 작용했다.

그러다 엔론이 파산하고 이 바람에 수많은 근로자와 연금수혜자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자 911 테러이후 굳게 닫혀져 있던 게이트의 빗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엔론 드라마는 공화당과 민주당과의 갈등구조 속에서 탐욕의 무리와 약자간의 갈등, 기업비밀주의와 주주 민주주의의 대결구조로 거듭 나면서, 민주당의 역할 또한 커진 것이다.

지난 주 의회 예산 사무소(Congressional Budget Office)는 연방재정 흑자의 70%가 지난해 세금 감면과 911 사태 이후 경기 침체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상황에서 엔론사의 파산은 예견된 일이다.

그리고 ‘엔론’이라는 단어는 ‘근로자의 연금으로 고위층을 먹여살린다’는 뜻의 동사로 바뀌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민주당 파상적 정치공세

엔론 게이트를 계기로 정치공세를 펼 수 있는 소재를 한참 찾던 민주당은 선거운동 자금법 개정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지난 주 일부 선거자금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지지하던 민주당 인사들은 마침내 218번째 서명을 얻어내 법안을 기사회생 시켰다.

마치 훔친 신용카드로 얼마나 쓸 수 있는지 실험해 보고 싶어하는 10대처럼 민주당은 이번에 에너지 정책으로 화살을 돌렸다. 대선주자를 꿈꾸는 딕 게파트 상원의원은 미국이 2010년까지 에너지를 자급자족하도록 하는 ‘아폴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역시 대선 주자를 꿈꾸고 있는 존 케리 상원의원도 지난 주2020년까지 전기 생산을 20% 늘리도록 하는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제안했다. 이 두 제안에 대해 백악관은 현재의 에너지 정책을 고수하겠다고 밝혔다.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2/02/06 17:0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