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六甲 맞은 金正日

좀 엉뚱한 질문을 던져 본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서울 방문. ‘6갑’(甲ㆍ10의 북한 표현)을 지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다스리는 평양. 2002년 2월 16일 이후 평양의 시각은 몇 시를 가르치고 있을까.

부시 대통령도, 김 위원장도, 이들 두 사람을 포용해야 하는 김대중 대통령도 평양의 현재 시각이 전쟁의 결정을 알리는 D마이너스(-)나 플러스(+) 몇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부시는 동북아 3국 방문에 앞서 가진 한ㆍ중ㆍ일 기자회견에서 ‘악의 축’에 북한이 낀 것에 대해 말을 삼갔지만 소신은 여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나는 북한에 대화를 하자고 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들이 응하지 않았다. 나는 내 입장을 명확히 할 것이다. 그들의 국민을 가난하게 한 사람들이 대량학살무기를 만들고 팔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전쟁을 하겠다거나 그 정권을 뒤집기 위해 방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의 동맹유지가 미국의 안보에 요긴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서울 가까이 있는 북한의 재래식 화력은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북ㆍ미 대화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평양은 이런 워싱턴의 소신을 멀리했다. 지금까지 즐겨 쓰던 ‘6갑잔치’라는 말 대신 ‘탄생일 60돌’ 로바뀌고 2월 11일부터 백두산 밀영에서 평양, 해주, 금강산까지 김 위원장을 칭송하는 행사를 벌였다.

짧게 요약하면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제국주의 침략자’인 미국의 속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번 ‘6갑’잔치는 김일성 수령의 탄생 ‘90돌’를 위한 사전 행사며 김정일 위원장은 ‘위대한 수령’이아니고 ‘위대한 영도자’이며 북한이 김일성 왕조 국가임을 널리 알리는 큰 잔치였다.

김 위원장은 그 많은 행사에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수령이 1972년 6갑 때 기고만장의 기세로 7ㆍ4공동성명, 12월 헌법개정으로 김일성 왕국의 기초를 닦을 때와 비교하면 왕국의 기(氣)는 꺾인듯하다.

그의 아버지 수령이 8갑을 맞아 1992년 4월 27일에 공포한 세계 유일의 아버지의 아들을 위한 송시(頌詩)만큼의 찬사는 없었다. 새 천년의 찬사는 평양 시간을 D마이너스 혹은 왕조시대로 돌리려는 듯 복고풍의 한문투 왕조어투성이였다.

김일성은 그때 “80세는 청춘, 90세는 환갑”이라고 했다. 불과 2년여 앞으로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몰랐다. 그가 이룬 최대의 업적은 그를 ‘영생의 주석’, ‘영원한 수령’으로 만든 아들에게 ‘김일성의 나라’를 주는 것이었다.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 있고 소백수 푸른물은 굽이쳐 흐르구나.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 돌인가.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다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 땅을 뒤흔든다”는 칭송은 ‘성공적인’ 김씨 왕조 상속의 전주곡이었다.

상속의 징조는 1995년 2월부터 나타났다. 과거의 왕조체제 시절에는 경사가 있을 때마다 신화와 이적이 일어났듯이 백두산과 평양에 이중 무지개가 생겼다는 기사가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96년에는 원형 무지개가 떴다.

97년 황장엽 비서가 망명 이후에야 이런 천변만화(天變萬化)의 신화는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등장했다. 이해 그의 생일날 노동당은 “우리당‘붉은기 사상’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에 대한 절대적인 숭배사상이며 투철한 수령 결사 옹호정신”이라고 헌사했다. 그때 김 위원장의 나이는 55세였다.

올해 2월 15일 개최된 경축 중앙보고대회에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는 노동당을 대표해 김 위원장에 장문의 축하문을 보냈다. “우리 조국을 필승불패의 사회주의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으로일으켜 세우신 천출위인이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다.” ‘천출위인’은 하늘이낸 위대한 인물(天出偉人)이란 말을 한문투로 만든 것 같다.

이런 현상은 복고도, 수구도 아니다. 수령 김일성이 죽음을 앞두고, 공산주의의 역사적 붕괴를 보면서 구상했던 김일성 왕조의 태생적인 퇴보성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평양의 시계는 결정의 시간, D데이를 향해 가는게 아니다. 거꾸로 후퇴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번 축하문중에 나온 ‘6ㆍ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해석 또한 퇴보적이다. “조국통일의 주체를 백방으로 강화, 천리혜안과 선견지명과 대용단으로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이라는 해석은 ‘천리혜안’, ‘선견지명’, ‘대용단’ 같은 낡은 투의 언어에 쌓여 있다. 그런 영도자를 조 명록 차수는 ‘인류의 영재’, ‘현시대의 가장 노숙한 정치원로’ ‘김정일 각하’라 표현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을 11년간 경호했다가 2000년 8월 서울에 망명한 이영국씨는 김 위원장을 ‘자기 탐닉적인 인간’이라고 증언 했다. “포용정책은 김정일이 변하지 않는 한 이뤄지지 않습니다. 변화하면 그 자신이 망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먼 옛날을 향해 인민과 시민이 신민처럼 복종하는 왕조국가를 향해 21세기에 19세기 그 이전으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2/1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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