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96)] 다카라즈카(寶塚)와 시키(四季)

일본만큼 묵직한 미술 전시회가 자주 열리는 나라도 드물다. 전국의 공·사설 미술관이나 백화점 등에서 다투듯 열리는 전시회는 세계적 거장의 작품전만으로도 한해 달력이 꽉 찰 정도이다.

본고장인 파리나 뉴욕보다 도쿄(東京)가 세계적 명품을 접할 기회가 많다는 얘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거품 경제가 절정에 달했던 80년대말 국제 경매시장을 싹쓸이하듯 사들인 미술품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어 웬만한 전시회는 언제든 기획할 수 있다.

또 세계 주요 미술관의 소장품이 수시로 일본 초대전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전시회가 관람객을 부르고, 관람객의 열기가 세계의 명작을 불러 들인다. 큼직한 전시회가 열리는 미술관앞에는 멀리 지방에서까지 몰려 온 관람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학생 단체 관람객을 찾아 보기 어려운 대신 중노년층 관람객이 부쩍 눈에 띈다. 같은 전시회를 서너번씩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열기는 패션 브랜드 열병과 곧잘 비교된다. 평소의 검소한 생활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세계적 고급 패션브랜드의 70~80%를 소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명품으로 알려진 핸드백이나 시계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사들이는 소비 행태와 유명 화가나 그림의 전시회라면 무조건 보려는 의욕은 마찬가지다.

모든 유행의 바닥에 깔린, 집단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으려거나 집단속에 자신을 감추려는 잠재 의식은 전시회 관람객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전시회 열기를 사시로 볼 일은 아니다. 경제적 여유가 고급 문화 소비를 자극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오히려 부러움이 앞선다. 평화와 경제 번영은 문화 예술 발전과 직결됐다.

가부키(歌舞伎)는 에도(江戶)시대의 평화와 화폐경제 발전을 바탕으로 꽃피었다. 마찬가지로 60년대 이후 고도 경제 성장은 현대 일본의 문화 예술 기반을 크게 성숙시켰다.

그 가운데 우리와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진것이 대형 뮤지컬의 성공이다.

일본에서 뮤지컬은 현대판 가부키로도 불린다. 가무극의 형식이나 화려한 무대 등이 다를 바 없어 친근감을 느낄만한 장르이다. 이런 친근감과 경제력이 맞물린 윤택한 토양이지만 ‘다카라즈카(寶塚)’, ‘시키(四季)’ 두 극단을 빼고는 뮤지컬이 지금처럼 튼튼하게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지난해 두 극단이 동원한 관객만도 480만명에 이른다.

1914년 효고(兵庫)현 다카라즈카시에서 창립된 다카라즈카 극단의 정식 명칭은 '다카라즈카 가극단'이다. 가부키와 정반대로 여배우만으로 이뤄진 극단이며 단원 충원이나 운용방식이 특이하다. 다카라즈카 단원이 되려면 우선 2년 과정의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 들어가야 한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오기 치카게(扇千景) 국토교통성장관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 오랫동안 '스타 산실'로 불려왔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동에서는 도쿄대학, 서에서는 다카라즈카'라는 말이 만들어질 정도이다. 2년동안 노래와 연기, 발레와 재스, 고전 무용 등을 익히고 졸업하면 극단에 들어가 ‘하나(花)’· ‘쓰키(月)’· ‘유키(雪)’ · ‘호시(星)’ ㆍ‘소라(宙)’ 등 5개 ‘구미(組)’, 즉 학급에 배속된다.

현재 65~73명인 구미는 공연의 기본 단위이자 서로 다른 작품을 다른 무대에 올리는 내부 경쟁의 단위이다. 단원은 ‘세이토(生徒)’, 즉 학생이라고불리며 입단 년차에 따라 '연구과 ○년생'이라고 불린다. 일정한 기량에 이른 학생은 구미에서 나와 ‘센카(專科)’에 소속된 채 각 구미의 공연을특별 출연 형태로 도와 준다.

여배우가 남자역까지 소화해야 하는 다카라즈카 뮤지컬은 부자연스럽고 더러는 퇴행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런 색다른 분위기를 즐긴다. 74년 초연한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거둔 공전절후의 인기가 좋은 예이다.

'가늘고 긴 다리의 얼굴 예쁜남자'를 표현하는 데는 원작인 만화 이외에는 다카라즈카 여배우 이상이 없었다.

극단 시키는 다카라즈카식의 변형 뮤지컬과는 달리 정통 뮤지컬을 추구해 왔다. 53년 창립후 7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뮤지컬에 매달렸다는 점에서 극히 눈부신 성공이라고 할 만하다. 2관을 갖춘 도쿄의 극장 등 전국 4개 전용 극장에서 연간 약2,300회의 공연을 하는 데 '라이온 킹' 등 인기작은 수개월전부터 입장권이 매진된다.

'오페라좌의 괴인'이나 '캐츠' 등 장기 공연 작품도약 80%의 판매율을 보인다. 본고장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무대장치와 노래와 춤이 극단 시키의 자랑이다. 회장이자 총연출가인아사리 게이타(淺利慶太)의 엄격한 손을 거친 작품은 관객들에게 브로드웨이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2/02/1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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