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황규현(上)

목이메여 부르던 <애원>을 기억하십니까

황규현이란 가수이름을 기억하는 대중들은 드물다. 그러나 70년대를 걸쳐 시원한 목소리로 대중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던 히트곡 <애원>의 노랫말 "목이메여 불러보는 내마음을 아시나요. 사랑했던 내님은 철새따라 가버렸네..."의 애절한 멜로디는 타임머신인양 까맣게 잊어버린 옛추억을 되살려놓는다.

미8군출신으로 60년대 록그룹 <포가이스> <플레이보이> <쉐그린>의 리더겸 보컬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황규현.

60-70년대초는 외국곡을 얼마나 똑같이 연주하고 노래하는가를 놓고 록그룹의 우열을 가렸던 한국록의 암흑시기였다.

최초로 창작곡을 발표했던 록의 대부 신중현 마져도 이 당시엔 무시당하는 일이 허다했을만큼 외국곡을 연주해야 대접받던 잘못된 사대주의 풍토가 만연했다. 황규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폼나는 외국곡이 아닌 소울풍의 가요 <애원>을 불러보라는 음악친구 박진하의 간청이 영 못마땅했다.

"당시 폼잡고 불렀던 외국곡에만 열광했던 팬들조차도 마지못해 불렀던 <애원>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창작곡의 개념이 없던 당시의 음악적 공허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30여년이 지난 요즘 황규현이 회한에 젖어 하는 말이다.

황규현은 1947년 3월 20일 서울 약수동에서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를 맞아 2남2녀의 이복동생을 두었다. 친모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지낸 장충초등학교시절의 유일한 취미는 야구였다.

휘문중학에 들어가 1년간 야구선수생활을 했지만 보수적인 부친의 반대와 계모에 대한 반항심이 커지면서 성격이 삐딱해져갔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밴드부에 들어가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음악과의 인연이다. 당시 함께 했던 밴드부원 안건마는 70년대를 풍미했던 편곡자로 유명하다. 놀기위해 음악을 시작했지만 낫킹콜, 패티 페이지, 벨라폰테의 노래들은 가정사로 어두워진 어린 마음을 위로하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63년 당시는 한명숙, 현미, 최희준 등 미8군출신의 허스키 보컬가수들이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휘문고 1학년 황규현은 음악수업시간에 팝송 을 불러 선생님으로부터 '쉰목소리가 매력적이다. 가수가 되보라'는 칭찬을 듣자 어깨가 으쓱해졌다.

국민학교 동창인 차중락의 동생 차중용은 둘도 없는 친구. 우연히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안방에서 미8군 오디션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김홍탁, 윤항기, 차도균, 차중락 등 그룹 키보이스 멤버들의 연주를 듣고 정신이 혼미했다.

매일같이 찾아가 구경을 하는 황규현에게 키보이스 멤버들은 장난삼아 노래를 시켰다. <모나리자> <투영> 등 팝송들을 소울스타일로 멋들어지게 부르는 황규현의 노래를 듣고 김홍탁등 멤버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후 문래동 728헌병대의 미군클럽공연은 물론 뒤세네, 세시봉의 일반무대공연에도 함께 다닐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65년 겨울 키보이스의 매니저 송재일은 동두천 미군무대에 줄을 대주었다.

빡빡머리를 한채로 비틀즈밴드(당시 연주만하는 밴드가 아니고 보컬이 있는 밴드는 모두 이렇게 부름)라는 4인조 캄보밴드를 결성, 보컬을 맡으며 본격적인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제법실력을 다진 67년쯤엔 이태원 세븐클럽에 진출 록그룹 FOUR GUYS의 리더 한웅이 HE5를 창립하며 팀을 떠나자 2기 포 가이스를 결성했다. 새롭게 결성한 2기는 보컬겸 리듬기타 황규현, 기타 이승재, 베이스 조경수, 드럼 우승만의 제법 쟁쟁한 라인업이었다.

기타 이승재는 후에 솔로로 독립 공전의 히트곡인 <눈동자>를 발표했고 베이스 조경수는 <아니야> 등으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황규현은 "당시 포 가이스의 미8군 오디션등급은 B클라스였다. 실력은 A클라스급이었지만 개런티가 높아지면 공연부킹이 어려워져 의도적으로 B클라스를 유지했고 실제로 이런 그룹들이 꽤 많았다. 당시 미8군소속 그룹들은 미군들이 좋아하는 음악만을 선곡하여 연주했기에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할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68년 UN클럽으로 주무대를 옮기며 5인조 록그룹를 결성했다. 라인업은 보컬 황규현, 기타 정명용, 베이스 김종구, 리듬기타 이승종, 드럼 김철회였다. 하나같이 훤칠한 외모에 신장이 170cm이상인 미남들로만 구성된 플레이보이는 명동 미도파살롱에서 키보이스를 능가하는 인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인기만을 우선해 외모에만 신경쓰다보니 음악성이 떨어져 68년말 탈퇴를 했다'고 고백한다. 처음으로 음악적 갈증을 느끼며 결성한 5인조 록그룹 <쉐그린>.

1기 쉐그린의 라인업은 보컬 황규현, 기타 정명용, 리듬기타 이태원, 베이스 전언수, 드럼 김철회였다. 전언수는 미8군 컨츄리쇼 베이스 주자였고 이태원은 아마추어 대학생가수로 이름을 날리던중 쉐그린 멤버로 영입되며 대학까지 도중하차했다.

이태원의 소개로 교체된 미8군밴드 기타리스트 조동진의 등장은 주목할만하다. 80년대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하며 본격적인 언더가수장르를 연 조동진이 포크가 아닌 록 기타리스트로 60년대말 음악생활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록그룹 쉐그린의 리더 황규현에겐 필생의 히트곡 <애원>을 탄생시키기 위해 트로트가수겸 작곡가 박진하, 히트곡제조기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과의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2/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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