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돈 NO"… 재계가 왜?

부당한 정치자금 거불 결의, 불투명한 대선판도

재계가 올해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에서 부당한 정치자금을 내지 않겠다고 공식 천명, 그 선언 배경과 실천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간 정치권과 재계가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만 되면 재계는 ‘불법 정치자금은 없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떠들어 댔지만 정작 선거가 끝나면 어김 없이 불법 정치자금 문제가 터져 나왔다.

‘세풍’ 사건에서 보듯 이런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관행은 1997년 대선 때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재계의 최근 움직임에 정치권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번 재계의 부당 정치자금 거부 결의가 형식적에 불과했던 예전의 선언과는 사뭇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재계는 지난해부터 정치자금문제에 있어 지금까지의 입장과 다른 행보를 취할 것이라는 뉘앙스를 조금씩 풍겨 왔다. 얼마 전부터 재계에서는 ‘A그룹 회장이 유력 정치인의 만남 제의를 피하기위해 해외 출장을 갔다’, ‘B그룹은 정치권과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다 2월초 손길승 SK회장이 신문방송편집인협회에서 갑자기 ‘부당한 정치자금은 제공하지 않겠다’고 발언, 정치자금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손 회장의 발언이 각 언론과 정치권으로부터 긍정적으로 비춰지면서 재계에선 잇달아 정치자금과 관련한 의견을 직ㆍ간접적으로 쏟아져 나오기시작했다.


여야 미묘한 입장차

8일 전경련은 회장단 회의를 열어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정당하고 투명한 정치자금만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기업 자율실천사항’을 의결한데 이어 16일에는 ‘윤리 경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전경련은 예전처럼 공동 정치자금을 모금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발표 했다.

급기야 22일 정기총회에서 부당한 정치자금 거부를 골자로 한 ‘기업인 자율실천 결의사항’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재계 행보로 보아 분명 전과는 다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재계의 결정에 정치권은 여야할 것 없이 환영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받아 들이는 입장은 여야 간에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간 선거 때가 되면 기업들은 너나할 것 없이 ‘어느 후보에 어느 정도의 선거자금을 드러나지 않게 지원하느냐’로 골머리를 앓았다.

대통령 선거의 경우에는 당선이 유력한 여당 후보에게 ‘줄대기’를 시도하려고 각종 루트를 총동원하는 게 기본이었다. 여당 보다는 적지만 야당 후보에도 형평성 차원이나 혹시 있을지도 모를 ‘돌발 사태’에 대비해 ‘보험금’ 형식으로 약간의 선거 비용을 지원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이던 3공, 5공, 6공 시절 각 기업들은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군부 실세와 접촉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1992년 대선 때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그룹 총수가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현대 그룹은 YS가 집권기간 내내 적지 않은 고초를 겪어야했다. 이처럼 기업은 선거철만 되면 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정치권과의 결탁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이처럼 기업들이 필요악으로 여겼던 정치자금을 공개 거부한 진짜 배경에 대해 정계와 재계 내부에서 적잖은 논란이 일고 있다.

전문가들은 재계의 이런 움직임은 기업 환경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최근 기업의 재무ㆍ회계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해져 기업이 정치 자금용을 지원할비자금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치권의 보호를 받던 시절까지만 해도 기업들이 거액의 불법 비자금을 만들어도 정치권과의 밀약에 따라 눈감아주곤 했지만 이제는 그런 타협이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정치 자금 외에는 기업이 음성적인 자금을 지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업 경영에 미치는 정치권의 영향력이 전에 비해 현저히 감소한 것도 한 원인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 경제가 외국 자본에 대폭 개방되면서 정치권의 입김이 경제 활동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정부 정책보다는 오히려 시장 원리가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상황에서 굳이 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정치권에 손을 내밀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정치권 영향력 감소, 기업회계도 투명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재계 변화의 진짜 이유가 ‘불투명한 대선 판도에 있는것이 않느냐’는 분석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있다.

지난 1997년 대선 때까지도 여당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번 선거에서는 사상 첫 여야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그때부터 기업들도 ‘무조건 여당’이라는 식의 사고를 버리게 된 것이다.

더구나 현 DJ 정권이 온갖 벤처 게이트로 야당에 비해 지지도가 크게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 재계로서는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번 재계의 부당 정치자금 거부결의에 대해 여권의 속내는 그리 편치 않은 게 사실이다. 민주당 측 대선 예비 후보들은 재계의 이 같은 입장이 결국은 ‘친재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측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정치 자금이라는 것이 어차피 야당 보다는 여당 쪽으로 쏠릴 수 밖에 없는 데이를 잘 알고 있는 재계가 미리 선수를 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간 재벌 개혁을 강조해온 김근태 노무현 정동영 상임고문과 유종근 전북지사는 전경련의 입장에 대해 “재계가 정치 자금을 무기로 친 재벌 정책을 압박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비판하고 나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현재 비교적 상황이 나은 편인 이인제 한화갑 고문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재계 움직임에 원론적인 찬성 입장을 보이고 있다.


기업의 정치적 중립의지 지켜질까?

정치권은 그러나 본격적인 선거전이 시작되면 재계의 이 같은 합의가 지켜질 지는 의문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재계가 전경련이라는 대표기구를 통해 이번 선거 정국에서 친재벌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갈려고 함께 목소리를 냈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런 담합은 일시에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선거에서 보더라도 각 기업은 겉으로는 중립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후보마다 핫라인을 연결, 지속적인 관리를 해왔기 때문이다.

한 학계 전문가는 “현행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 구조와 로비에 의존하는 기업 경영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정치권과 재계의 검은 유착 고리가 근절되기 힘들다”며 “정치권과 재계의 공생 관계가 이뤄지기 어렵게 기업 투명성 제고, 정치자금법 현실화 등 제도적 보완책을 강화하는 쪽으로 해결책을 찾아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2/28 13:44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