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98)]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장편 만화영화 '센(千)과 치히로(千尋)의 행방불명'이 일본 극장가를 휩쓸고 있다.

지난해 여름 개봉 이래 이미 2,300만 명이 넘는 일본 영화 사상 최다 관객을 동원, 이제는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이후 연장 상영이나 재상영 결정이 잇따라 앞으로도 당분간 인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거기에 ‘해리 포트-현자의 돌’과 ‘반지의 제왕’열기까지 겹쳐 올들어 일본 극영화의 설 자리가 좁기만 하다.

이런 가운데서도 도에이(東映)가 창립 50주년 기념작으로 연초에 개봉한 ‘천년의 사랑- 히카루겐지(光源氏) 이야기’는 꾸준히 흥행 랭킹에 들고 있다.

와세다(早稻田)대학 출신의 지성파 여배우로 ‘국민 배우’로 꼽히는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의 원숙한 연기, 원작인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 대한 일본 전통의 뿌리깊은 사랑이 성공의 요소이다.

8세기에 편찬된 ‘만요슈’(萬葉集)가 일본 고전 시문학을 대표한다면 11세기에 씌어진 ‘겐지모노가타리’는 고전소설 문학을 대표한다. 애초에는 ‘겐지노모노가타리’(源氏の物語)로 불렸으나 가마쿠라(鎌倉)시대에는 ‘히카루겐지 모노가타리’가 일반적이었다.

작자 무라사키 시키베(紫式部)는 중류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문인과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으나 벼슬운이 없어 궁중 의전실인 시키베의 중급 비서에 머물렀다.

무라사키는 어려서 어머니와 사랑하던 누이동생까지 잃은 데다 뒤늦게 결혼한 후 딸 하나를 낳고는 남편과도 사별했다. 이런 슬픔, 특히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불행에 대한 자각이 겐지모노가타리의 바탕을 이루었다.

겐지모노가타리가 높은 평판을 받은 것을 계기로 그는 이치조(一條) 천황의 중전 아키코(彰子)의 여관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궁중에서는 비빈들 사이에 황위 계승권을 둘러싼 암투가 심각했으며 재능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천황의 발길을 끄는 것이 유행이었다. 궁중에 들어간 후 붙은 무라사키 시케베라는 이름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무라사키노우에(紫上)와 아버지의 관직에서 나왔을 뿐 본명을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겐지모노가타리는 모두 54편으로 이뤄졌으며 필사본으로, 또는 그림에 글을 곁들여 54첩의 두루마리에 담은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繪卷) 형태로 전해져 왔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은 천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지만 생모의 신분이 낮아 황족에 들지 못하고 ‘겐지’(源氏)라는 성을 받아 신하가 된다. 용모가 수려하고 자질이 뛰어나 모두들 ‘히카루겐지’라고 불렀다.

그는 성장하면서 수많은 여성들과 애정 행각을 벌인다. 특히 어릴 때 여읜 생모를 닮은 아버지의 정실 후지쓰보(藤壺)를 깊이 사랑해 불륜의 아들까지 낳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지방으로 유배되나 2년 후 돌아와 어린 천황의 후견인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다.

그는 대저택을 짓고 가장 아끼는 무라사키노우에를 비롯, 관계를 가진 여성들을 모아 함께 지낸다. 황실의 권유로 황녀 온나산노미야(女三宮)을 정실로 맞아 들이나 이에 배신감을 느낀 무라사키노우에가 상심 끝에 세상을 떠난다.

한편 온나노산노미야는 청년 카시와기(柏木)와 밀통, 가오루(薰)를 낳는다. 아내의 밀통과 사랑하는 무라사키노우에의 죽음에 번뇌하던 히카루겐지는 속세를 떠난다.

가오루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의문을 느끼고 불교에 심취, 히카루겐지의 이복 동생으로 우지(宇治)에 은거한 야쓰노미야(八宮)을 자주 찾는다.

그의 딸 오키미(大君)를 사랑하게 되지만 오키미는 그를 받아 들이지 않고 대신 그가 동생 나카노기미(中君)와 맺어지길 바란다. 가오루가 친구인 니오노미야에게 나카노기미를 넘기자 오키미는 상심하다 병사한다.

가오루는 죽은 오키미를 빼어 닮은 이복 동생 우키후네(浮舟)와 사랑에 빠져 우지에 숨겨두고 만난다. 니오노미야도 그녀에게 끌려 가오루로 변장해 범하고 만다. 우키후네는 강물에 몸을 던지나 구출된 후 여승의 길을 간다. 그래도 가오루는 그녀를 잊지 못한다.

너저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상류사회의 사랑 놀음 이야기지만 여성 특유의 감각을 바탕으로 한 치밀한 심리·정경 묘사와 미려한 문체에 의해 문학으로 승화했다.

특히 히카루겐지 출가 이후 가오루를 중심으로 그린 마지막 10편의 문체는 백미로 꼽힌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등장 인물의 복잡한 관계와 줄거리를 외울 정도로 끊임없이 읽고 있다. 수없이 현대어로 새로 번역되고 영화 등으로 각색되고 있어 앞으로도 그 생명력은 이어질 전망이다.

김범수 국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2/03/06 13:57


김범수 국제부 bs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