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향 전문가 송인갑

"우리 야생화는 훌륭한 香草"

향(香)을 말한다. 향수가 아니라 향을 말한다. 향을 말하는 이 남자의 향기는 모호하다. 거친 듯 하면서도 부드러울 것도 같고, 뚜껑을 열기 전에 도무지알 수 없는, 이를테면 잘 밀봉된 향초(香草) 같다. 향 전문가 송인갑(44)의 관심은 요즘 단 하나에 집중돼 있다.

“향 밸리(valley)를 만들겠습니다.”

향기를 좇아 다닌 지 18년이 넘었다. 사람들은 향수 전문가로 보지만, 향수는 사실상 향 전체의 100분의 1에도 지나지 않는 사소한 잔뿌리다.

세계적 브랜드로부터 국산 상품까지 향수라면 손바닥 보듯 훤한 송씨. 그러나 합성향은 진작에 한계를 느꼈다. 대신 천연의 향기가 마음에 꽂혀버렸다.

어느 화학 실험실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자연의 기가 자연의 향속에 살아있었다. 그 거대한 자연 향의 메카를 바로 우리 땅에서 일구겠다는 꿈, 전문가 송씨의 마음을 차지해버렸다.

“직접향이나 향수를 제조, 개발하기도 하지만 저는 조향사는 아닙니다. 향에 관련된 모든 분야를 연구하고 다루는 향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국내에서도 프랑스 유학을 거쳐 조향사가 되는 분들이 조금씩 늘고 있지만, 조향 분야만 해도 제대로 터득하자면 기술뿐만 아니라 철학과 역사, 문화가 조합되는 아주 어려운 분야입니다. 화학적 기술로만 이해하는 건 극히 일부만 보는 겁니다.”


TV보며 바다냄새, 된장냄새도 함께

우향 알앤디라는 향 전문연구소도 차린 그는 이미 자체 아이디어로 독특한 상품들을 내놓기도 했다. 우리 고유의 천연 식물을 이용해 만든 향 제품들이다.

녹차, 야생화, 유자 등 재료도 여러 가지, 방법도 기존의 분무식뿐 아니라 팬을 이용해 액체 형태의 향을 기체화시켜 발산시킨 제품, 물에 녹여쓰는 제품, 또는 불을 붙여 태워 쓰는 제품 등 다양하다. 그 중 녹차향을 재료로 한 제품 8종은 일반 시장에 출시하기도 전에 이미 아는 이들사이에 소문을 타고 있다.

더 복잡한 작품도 있다. 엘리베이터 운행 중 승객이 있을 때 만 자동센서가 감지해 천연 향을 기체형태로 은은히 뿜어주는 엘리베이터용 향기 발생장치는 이미 특허를 받아 기업체에 쓰이고 있다.

말할 때 마다 향기가 나오는 휴대폰용 장치도 실용신안을 받았다. 그 외에도 운전시 졸음을 쫓아주는 향이 뿜어지는 자동차용 장치에다 아직 그 누구도 상상도, 시도도 한 적 없는 ‘냄새가 있는 TV'시대까지 한창 개발중이다.

그 서막으로 현재 진행 중인 것이 냄새가 있는 PC. 자연물이나 음식 등 PC 화면에 특정장면이 나올 때마다 그 고유의 냄새가 자동으로 풍겨 나오게 하는 작업이다. 수 십 종의 다양한 냄새를 내는 향 물질을 키트로 장착, 그에겐 이미 환상이 아니라 현실로 만들어지고 있다.

“TV에서 빠져 있는 게 냄새밖에 없습니다. 기술 발달로 청각, 시각은 어느 정도 만족됐지만 냄새만 빠져있습니다. 드라마에 바다가 나올 때 짠 냄새가 나고, 된장찌개가 보일 때 찌개 냄새가 흘러나오는 걸 상상해보셨습니까.

황당해보이겠지만, 실제로 얼마 후면 실현해 보일 겁니다. 사실 후각만큼 진실된것이 없습니다. 코는 기의 통로입니다. 상한 음식도 눈으로만 보면 상했는지 안 상했는지 속 을 수도 있지만 직접 냄새를 맡아보면 상한 냄새에 금새알게 됩니다.”

이쯤에서 정말 ‘개코’같은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향에 예민할 수 밖에 없는 직업인데 혹시 특별한 후각관리라도 하고 있습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남들처럼 편안하게 생활하면서 냄새를 맡을 뿐입니다. 일상속에서 만나는 모든 냄새를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향밸리 개발계획, 야생화도 상품화 작업

그의 역작 중 하나는 유자향을 이용한 것이다. 이것은 농촌경제와도 직결된 기대작이다.

이제껏 유자는 과육을 차로 이용해 온 것이 전부지만 그가 추진하는 유자향 개발 프로그램 안에는 과피는 과피 대로 태워 향 제품으로 만들고 과육은 원액을 추출해 향수 등으로 이용, 상품으로서의 독특한 가치뿐 아니라그간 애써 유자를 가꾸고도 상당량을 폐기 처분해야 했던 재배 농민들의 소득까지 함께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실제로 이 같은 현실적인 이유로 최근정부에서도 그의 연구성과를 인정, 앞으로 본격적인 조성에 들어갈 전남 구례군의 대형 '향 밸리'도 전폭적인 지원혜택을 받게 됐다. 이밖에도 야생화수 백 종도 상품화 작업 중이다. 이처럼 많은 계획들 때문에 송씨는 “너무 즐거워 늙을 시간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향을 제대로 알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 합니다. 한가지 분야만 띄워도 100여 가지 직업을 동시에 창출하게 됩니다.

향은 우리의 상상 이상 아주 엄청난 자원입니다. 문화적인 가치뿐아니라 산업적인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기술로서 우리가 외국 향 시장을 따라잡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미 100년이나 역사가 뒤져있는데 이제출발해서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고유의 것이라면 승산이 있습니다. 향 소재도 외국에서는 맡을 수 없는 우리만의 천연 재료를 이용하고, 용기도 고려청자처럼 외국에선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하는 우리 고유의 디자인을 이용하면 오히려 쉽게 앞설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감각이 발달했었던 것 같다. 코흘리개 시절에도 상표를 보지 않고도 눈감고 사탕 맛으로 제품을 구별하는 것이 특기였다. 산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고등 학교 때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한 그는 바람처럼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떠돌았다. 의사, 사업가 등 정석 모범생들만 가득한 집안에서도 유독 별종이었다.

1976년 명지대에 입학,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후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30대엔 돌연 목사가 되겠다며 신학을 공부한 적도 있다. 군대에서도 탁월한 웅변 실력으로 전방부대에서 후방 부대로 전속되기도 했다.

직장생활도 한때 경영정보 연구원으로 근무한 것을 비롯 향수와 담배 회사에서도 근무한 바 있다. 18년 전 무역업에 뛰어든 그는 당시 세계적 브랜드의 수입 향수들을 국내에 들여와 백화점 등에 공급하는 일을 했었다.

국내에 유통되는 고급 수입 향수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갔을 만큼 수많은 향수를 접하는 동안 향수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점차 전문가로 인정 받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시작된 향수 강의는 현재도 10여년째 각종 기업이나 단체,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10년쯤 지난 어느날 그 일을 그만두고 나왔다. 그리곤 그 동안 번 돈까지 까먹으며 유럽 곳곳을 뒤져 향수산업에 대한 집중연구도 하고 여행도 즐기는, 스스로 행복한 백수처럼 수년을 지냈다. 사업가적 기질에다 재벌의 꿈까지 강력했던 송씨, 왜 마음이 변한 걸까.

“저는 욕심이 정말 많은 놈인데, 욕심을 쫓아가면 갈수록 제 자신이 변하는 걸 보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돈에 대한 집착이 커지고 커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인간이 아주 잔인해 질 수도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접어버렸죠. 그리고 유럽을 다니면서 여행 겸 평소 더 공부하고 싶었던 향수에 대한 분야도 더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결국 돈 욕심을 일 욕심으로 돌리는 것으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제 자신이 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덕으로 돌아가는걸 보았습니다.”

유럽에선 관련 전문시설이나 전문가 등을 찾아 다니며 향수에 관한 전 분야를 기초부터 탄탄히 확인해나갔다. 얼마 후 한 방송제작사의 제의에 따라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약 2년에 걸쳐 외국과 국내를 오가며 어렵게 찍은 테이프가 제작사측의 사정으로 분실되면서 방송은 무산돼 버렸다. 허탈한 일이었지만, 그에게 전혀 소득이 없는 경험만은 아니었다.

다큐멘터리의 중심에서 외국과 한국의 향 문화를 비교 분석하는 내용을 취재하던 중 그 자신도 몰랐던 한국의 향기를 뒤늦게 발견,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게 되었다. 서양 향수가 아닌 우리 고유의향기에 완전히 매료돼 버렸다.

“인위적인 향기를 백 번 맡는 것이 순담한 냄새 한번 맡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골의 풀 냄새, 들꽃 향기 등은 그 자체로 좋은 향기입니다. 따로 향수가 필요 없습니다. 인간에게도 향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선정을 베푸는 고을에 가면 마을 초입에서부터 좋은 향내가 풍기고, 악정이 있는 곳은 들어서면서부터 악취가 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향기를 만들기도 하고, 향기가 마음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쓰레기 통 옆에 있을 때 웬지 모르게 짜증이나는 것도 냄새가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향과 삶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향을 알면 알수록 삶이 행복해집니다.”


향을 귀로 듣는 경지, 향에 인생 걸어

웬만한 기존 향수는 스치는 옷깃에서 냄새만 맡아도 성분 계열을 알아맞히는 전문가. 그러나 자연의 신비 앞에서는 아직도 경외감을 감출 수 없다.

가끔 자동차를 몰고 가다 문득 바람결에 물 냄새 같은 것이 느껴져 ‘곧 비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실제로 30분이 지나지 않아 비가 뿌려지는것을 보았을 때, 그는 냄새가 주는 자연의 신호에 또 한번 놀랐다.

그는‘문향’(聞香)의 경지도 덧붙여 말한다. 향을 코로 맡는 게 아니라 귀로 듣는 단계다. 허황된 미사여구만은 아닌 것은, 냄새도 공기를 통해 퍼지는것이라 아주 극미하나마 나름의 진동과 떨림을 갖게 돼 아주 발달된 감각이라면 그 파동을 귀로 감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돈과 시간, 열정, 모든 것을 아낌없이 털어넣었다. 기본적인 향의 역사 등을 공부하는데 5년, 태우는 녹차향을 개발하는데도 4년 등 하나의 결과물마다 평균 3~4년의 시간을 끈질기게 참아냈다.

구례땅에 세워지는 향 밸리도 7년간의 눈물겨운 땀이 준 결실이다. 그는 이곳을 동양의 ‘그라스’(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향 마을)로 키울 자신이 있다. 앞 마당에 야생화를 둘러 심은 전문학교를 비롯해 연구소, 박물관, 식물재배단지, 음식점 등 앞으로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선배는 물론 동료 전문가 하나 없는 현실이 아쉽다.

“앞으로 5년 정도면 어느 정도 모양이 갖춰지리라 생각합니다. 10년쯤 지나면 거의 자리를 잡겠지요. 구례는 저와 특히 인연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직도 자연이 손상되지 않은, 몇 안되는 천혜의 땅 중 하나이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옛날에 사업을 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 연구소가 들어설 곳은 폐교를 이용한 곳인데 바로 곁으로 섬진강이 휘감아 흐릅니다.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는 향 밸리에서 마지막 닻을 내릴 것이다. ‘유산은 없을것’이란 선언을 들은 딸은 아버지 송씨에게 돈 대신 책 15권을 남겨달라고 주문했다. 그 색다른 유산 약속에 따라 그는 이미 ‘냄새, 우리의 향을찾아서’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발표해왔다. 향에 취한 그는 이제 그 스스로 바람이자 향이 되고 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3/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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