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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 하나에 연기가 죽고 살죠"

"소품 하나에 연기가 죽고 살죠"

소품 전문팀 '아트 비전' 전순호 팀장

“고생한 만큼 보람도 컸으니, 마지막 작품이라는 이름 값은 했다고 봐요.”

전순호(57) KBS 제작 2부 소품실 팀장에게 ‘태조 왕건’ 이 남긴 울림은 남다르다. 대하 드라마 소품 전문팀 ‘아트 비전’ 팀장으로 26년째 일하고 있는 직장인 KBS-TV를 오는 12월이면 정년 퇴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극하면 의당 조선시대물이 판쳐온 풍토에서 역사의 사각 지대인 후삼국 시대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기 위해서는 여타 사극보다 몇 곱절의 땀이 필요했다. 시대의 재현을 너머, 그것은 차라리 사실적 인류학이었다.

모두 7,000여점. 아트 비전 식구들이 방영 기간(837일) 동안 열심으로 만들어 냈던 실용성 빵점의 물건들이다. 무기 등 병장기류, 휘장 등 장식용품, 식기 등 생활용품, 어가(御駕) 등 운반 도구, 이불 등 침구류….

1981년 대하 드라마를 맡게 되면서 청계천 헌 책방을 뒤져 건진 낡아빠진 책이 이토록 큰 힘을 발휘할줄 몰랐다. 1978년 서울대 농학박사 이성우씨가 쓴 ‘고려 이전의 한국 생활사’. 삼국은 물론, 변방 민족인 여진족의 식탁 배치법까지 기록돼 있는 책이다.

그는 고지식하다는 말을 들을 만치 문헌을 따랐다. 쌀, 보리, 밤, 대추, 잣, 수박 등 화면 속의 음식물 모두는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감귤을 삼국시대에 먹었다는 기록에 따라, 뜻밖이긴 했지만 상에 올렸다. 음식 놓는 자리도 문헌상의 진찬법(陳饌法)에 의거했다.

방송 소품 작업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요즘 지천으로 깔린 플라스틱 음식모형은 금물. 그것들은 조명을 받으면 빛이 반사돼 사실감을 현격히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특히 문서에만 있을 뿐 완전히 사라진 무기를 문헌에 의거, 자신의 설계로 제작한 일은 한국의 TV와 영화를 통틀어 처음. 돌이나 불을 얹어 날리는 포거(抛車), 다연발 화살인 쇠뇌(한문으로는 弩砲), 보병용 쇠뇌인 노포(弩砲) 등 역사 드라마 속의 ‘신무기’ 행진은 사극의 통념을 무너뜨리기 족했다.

전씨가 무기들을 살려 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인간 문화재 궁장부문 유영기씨에게도 이 드라마는 고마운 것이 됐다. 종영 후 유씨의 고향인 파주군 탄현에 ‘궁시(弓矢) 박물관’을 연 것이다.

그는 1981년 사극 ‘대명’을 시작으로 KBS 역사 드라마 소품 부분에서 독보적인 일가를 구축했지만 ‘태조 왕건’만은 녹록치 않았다.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많은 시대극 중 하나였겠지만, 국내 최초의 후삼국 시대물이라는 과외의 무게는 뜻밖에 컸던것이다. 관련 문헌 탐독은 기본이었고 전문가들의 정교한 자문이 필요했다.

이강칠 전 육사박물관장은 무기 일반을, 임동권 중앙대 명예박사는 각종 의식을, 정진술 해군사관학교부 박물관장은 해상 무기를, 이현수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육상 무기를 기꺼이 조언해주었다.

자문과 자료에 따라 전 팀장과 팀원들이 3~4개월 설계등 사전 작업에 들어 가면, 외부 공장에 발주해 2~3개월 만에 현물로 태어났다.

소품 제작자들은 음지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부채를 배우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연기자가 죽고 산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소품 제작자들은 똑 같은 종류의 소품일 지라도 신분이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야 속이 후련하다고 전 팀장은 강조했다.

역사적 상상력과 극중 인물 개개인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소품 작업은 수박 겉핥기라는 것이다. 학문적 실증을 생명처럼 여기는 고증 위원들이 약한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03/0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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