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박달재

'천둥산(실제명 천등산) 박달재를/울고넘는 우리니망/물항라 저고리가/궂은비에 젖는구려/왕거미 집을 짓는/고개마다 구비마다/울었오 소리쳤소/이 가슴이 터지도록'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박재홍의 노래를 '울고넘는 박달재'의 구성진 가락이 오늘도 박달재 위에 울려 퍼지고 있다.

충북 제천시 봉양면 웑박리에서 시작하여 'S'자 형의 길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돌아 오르길 수십 번, 충북 내륙에서 가장 높다는 고갯길, 박달재(해발 560m)! 예전에는 고개가 너무 높고 험했지만, 이제는 고개도 많이 낮아졌고 길도 꽤 넓어졌다.

수년 전 아예, 천등산을 꿰뚥는 터널이 뚫려 박달재 고갯길은 역사의 뒤안길이 되어 관심이 있는 길손이나 거저 향수에 젖어 고갯길을 넘나들 정도다. 지금도 대중들사이에 널리 애창되고 있는 '울고넘는 박달재'이 노래말 사연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스며있다.

조선조 중기, 경상도이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르 보러서울로 가던 중, 이 산골의 벌말(오늘날 백우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서산에 해는 지고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벌말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박달 도령은 벌말의 한 농가에 들어 잠자리를 청하게 되는데, 그날밤 따라 휘영청 밝은 달이 하늘 높이 떠, 벌말의 한적한 마을을 비추고 객지의 밤이 주는 야릇한 마음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박달 도령은 방문을 열고 나와 산골의 고고한 달빛아래 서성거리던 중, 이 집 주인의 달 금봉이라는 처녀와 눈이 맞아 남몰래 정을 나누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박달 도령은 과거에 급제한 뒤, 혼례를 올리기로 굳게 맹세하고 다음날 날이 밝자 고개를 넘어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서울에 온 박달 도령은 금봉 아가씨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잠을 설치느라 공부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그 애틋한 그리움을 시로 써서 달래기도 했으나,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되는 구료/천등산 꼭대기서 그 고운 모습 못 볼진대/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갈거나.' 박달은 결국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만다.

금봉 아가씨를 볼 날이 없게 된 박달 도령은 서울에 그대로 머물며 재수할 준비를 한다. 박달 도령을 떠나 보낸 금봉 아가씨는 기다리다 지쳐 날이면 날마다 고개위로 올라가 서울쪽 하늘을 바라다보며 이름을 부르다가 그만 상사병으로 쓰러져 죽고 만다.

금봉 아가씨에 대한 그리움에 지친 서울의 박달 도령은 재수도 집어치우고 풀죽은 모습으로 벌말에 돌아온다. 그러나 금봉 아가씨가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절망에 빠진다.

그런데 넋을 잃은 박달 도령 앞에 죽었다던 금봉 아가씨가 화사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고갯길을 오르는 것이 보였다. 너무 기뻐 정신없이 따라가 와락 끌어안았는데, 순간 박달 도령은 천 길 낭떠러지에 굴러 죽고 만다.

금봉 아가씨의 환상에 박달이 떨어져 죽은 고개라 하여 '박달령' 또는 '박달치'라 불렀다는 것이다.(원래 이 고개는 똑 같은 고개가 둘이 있다고 해 '이등병'이라 불렀다. '대동여지도'에도 그렇게 표시되어 있다) 그 높디높은 박달재에 박달과 금봉의 숭고한 사랑이 박달재만큼이나 높아, 이루지 못한 그 사랑 노래가 오늘도 구성지게 울러 퍼지고, 봄이면 붉은 진달래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고….

옥선희 비디오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3/1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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