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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본(99)] 간료(官僚)

2월초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전 외무성 장관이 경질된 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지지율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다나카 전 장관의 대중적 인기에 이끌려 고이즈미 총리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이탈했다.

상당수의 유권자들이 다나카 전 장관과 외무성 관료와의 대립·갈등을 선악 대결로 단순화, 그의 경질을 고이즈미 총리의 개혁 약속 파기로 받아 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무성 관료를 ‘악의 존재’로 파악하는 대중의 정서는 지난해 외무성 기밀비 유용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왔다.

총리의 외국 방문 비용 등에 쓰는 기밀비를 물타기 청구 등의 수법으로 유용·횡령한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기밀비 사건은 앞서 1998년 커다란 물의를 빚었던 대장성(현 재무성)의 이른바 ‘접대 뇌물’ 사건과 함께 일본 관료 조직의 도덕적 해이를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당시 대장성 관료들은 금융계의 오랜 접대 관행을 검찰이 수사 대상으로 삼은 것 자체가 정치권의 금융·증권 비리를 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발했으나 여론은 이런 항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정치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믿었던 관료 조직마저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난 데 대한 국민적 실망과 분노가 워낙 컸다. 국민적 실망은 그만큼 관료 조직이 일본 사회의 중심 축으로 제 역할을 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본의 ‘간료’(官僚)는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패전의 잿더미에서 30년도 되지 않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요인을 우수하고, 국가 전체의 이해·목표 조정에 능숙한 관료 조직에서 찾으려는 것이 한때 구미 학계의 유행이었다.

정치권의 심부름꾼으로 실무에 급급해 온 우리 관료 집단, 이들을 지켜본 우리 국민들은 각각 서로 다른 시각에서 강한 부러움을 느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 풍미하는 관료 비판은 외부의 부러움을 산 중심 요소들에 집중되고 있다. 강한 엘리트 의식과 이에 따른 책임감에 대한 칭찬은 어느새 ‘비공식 권력에 맛들인 특권 의식’으로 바뀌었다. 이런 엇갈린 평가는 사회 분위기 변화의 반영일 뿐 탄생 이래 일본 관료 집단의 성격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일본은 1868년의 메이지(明治) 유신 이래 근대화의 길을 걸었지만 서구를 본 딴 근대적 관료제는 1885년 내각제도를 도입하면서 시작됐다. 처음 상급 관료는 천황이 직접 임명하거나 대신(장관)의 추천을 받아 임명했다.

관료는 천황의 충성스런 관리였던 반면 일반 국민에 대해서는 특권적 지배자였다. 참된 의미의 관료제는 1893년 문관임용령·문관시험규칙 공포와 이에 따른 각급 관리 채용 시험으로 가능해졌다. 과거제 경험이 없었던 일본에서 합격하기만 하면 누구나 고위 관리가 될 수 있는 고등 문관 시험은 획기적이었다.

이에 따라 사회적 유동성이 크게 높아지고 구성원의 출신 배경이 바뀌었지만 특권층이라는 기본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관료 양성을 목적으로 각지에 설립된 제국대학 출신은 고등문관 시험에서 예비 시험이 면제됐고 출제·채점은 제국대학 교수에 한정됐다. 더욱이 법률 지식을 중심으로 한 시험이어서 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이 합격자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특히 도쿄(東京)제국대학을 비롯한 일부 학교 법학부 출신이 압도적이어서 강력한 ‘가쿠바쓰’(學閥)를 형성했다.

이들은 채용되기만 하면 곧바로 고급 관료로 육성하기 위한 특별 관리를 받아 중·하급 관료와는 물론 다른 고등 시험 합격자와도 구별됐다. 메이지 유신의 중심 세력으로 당시까지 요직을 독점했던 사쓰마한(薩摩藩)·조슈한(長州藩) 출신의 '한바쓰'(藩閥)를 대체했다.

이들은 근대화와 패전후의 경제부흥에 기여했지만 민주주의 발전에는 부정적 측면을 드러냈다.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정당정치와는 태생적으로 부합하기 어려웠던 이들 중 일부 ‘혁신 관료’가 군부와 결탁해 군국주의로 이행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패전 후 관료 집단의 주도적 역할도 정당 정치의 공백과 무관하지 않다. 최대 권력자인 군은 해체됐고 55년 자민당 출범 때까지 정당의 결집력은 취약했다.

패전 후 고등문관 시험은 물론 고급 관료와 하급 관료 사이의 ‘신분제’ 폐지로 일본 관료 조직은 커다란 변화의 기회를 맞았으나 ‘신분제’ 관행을 떨치지 못했다. 상급 시험에 합격한 이른바 ‘커리어구미’(Career組)는 중·초급 시험 합격자인 ‘넌커리어구미’와 승진 속도와 최종 직위가 엄격하게 구별된다.

전체의 10% 정도인 ‘커리어구미’의 고위직 독점은 조직 내부의 심각한 갈등 요인이 되고 있으며 여론의 관료 비판도 커리어구미의 특권 의식과 무능에 쏠리고 있다. 일본의 중요한 특징으로 얘기돼 온 ‘관료 지배’가 날이 다르게 퇴색하고 있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2/03/1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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