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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선거, 돈 정치] 재계의 반란인가, 사전교감 인가

검은 돈 제공반대·대선후보 공약 검증 선언

“반(反) 시장경제주의 적이고 반(半) 사회주의적 정책을 지향하는 대선 후보에게 우리기업이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S그룹 L부사장) “공기업 민영화 문제만 놓고 보자. 선거철을 맞아 노동계의 부당한 요구를 옹호하고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기업의 발목을 붙잡는 기업규제 정책에 매달리는 후보에게 어떻게 표를 던질 수 있겠는가.”(D그룹 K상무)

“거짓 ‘고백성사’를 한 K 민주당 의원이나 반 민영화의 기수인 R의원 같은 사람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경우 우리의 경제 미래는 더욱 암담해지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 (전국경제인연합 K상무)


"정치인이 제공한 상품은 불량품"

재계가 부당한 정치자금 제공 반대와 대선후보의 공약에 대해 평가에 나설 것을 지난 주 공식 선언함에 따라 본격적인 선거철을 앞두고 정치권과 재계간에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여야간 정치자금 공방이 정쟁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는 가운데 재계의 이례적인 정치활동 개입공식 선언은 언 뜻 보면 정치권 전체를 향한 전면적 선전포고로까지 해석되기 때문이다.

특히 여야 각 당별로 이뤄질 대권 후보간의 경선에 이어 6월 지방선거와 8월 보궐선거, 12월 대선을 치르기 위한 자금비축에 목타는 정치권은 재계의 정치개입 선언에 겉으론 즉각 환영의 손짓을 보였지만, 내심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 배경과 진의파악은 물론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반면 재계는 이번 선언파장이 언론을 통해 과도하게 확대해석 될 것을 우려, 즉각 “정치활동 개입은 아니다”며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등 선언 파장에 따른 손익계산에 분주한 눈치다.

정치권은 재계의 이번 ‘외침’이 수 십년 간 관행처럼 여겨지던 정경유착의 근원인 불법 정치자금 지원을 끊고 정치권으로부터 기업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독립 선언’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 일단 수긍하는 표정.

그러나 재계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손길’과의 사전교감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기업(재벌)속성 상 구태여 이를 대외적으로 발표한 이유와 시기선정 등 선언배경에 잔뜩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심지어 정계 일부에선 이미 지난해 말부터 일부 정치권과 재계의 물밑접촉을 통해 선거철 마다 불거져 나온 신당 창당 등 정계개편을 의식, 이들의 정치자금 옥죄이기를 위한 사전 포석이란 소문마저 나돌고 있을 정도다.

“우리 사회는 정치 관료 엘리트와 기업 엘리트간의 파워게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정권만 바뀌면 기업인들만 큰 곤욕을 치른다. 정치와 기업 엘리트들이 수시로 만나 기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손길승 SK회장 2월1일 서울 프레스센터)

재계가 지난 주 정치참여를 공식 선언하고 나서기까지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재계 내부의 의도적이고 긴밀한 협의가 이뤄져 온 것으로 파악된다.

그 발단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의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12월초 주최한 한 정치개혁 관련 심포지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계의 씽크 탱크로 불리는 한경연이 경제연구소로는 극히 이례적인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회의를 열면서부터다.

시장경제 학파인 좌승희 한경연 원장은 ‘한국정치시장의 특성과 정치개혁과제’라는 보고서 발표를 통해 시장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정치현실을 해부했다. 정치를 하나의 상품이라고 가정할 때 상품의 공급자는 정치인이고, 소비자는 국민(기업)이라는 것이다.

좌 원장은 시장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정치인들이 공급하고 있는 상품은 불량품”으로 “그 이유는 정치력 집중에 있다”고 논지를 폈다. 그는 특히 “정치인은 정책과 법률이라는 서비스상품을 시장에 내놓고 고객확보 경쟁을 벌여야 하는데 1인 보스 중심의 정치 총수들이 공천권(인사권)과 정치자금(예산권)을 무기로 정치시장을 독과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따라서 독과점 구조(정치)는 언제나 비싼 요금(고비용)과 낮은 품질(저 효율)이란 해약을 소비자인 국민과 기업들에게 남겨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좌 원장은 당시 대권 후보의 공약사항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표현을 적시하지 않았지만, 국회의원의 경우 그들의 상임위 활동내용 공개 등을 통해 유권자(기업)들이 후보자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재계의 씽크 탱크를 대표하는 경제학자가 정치권을 향해 쏘아올린 첫 번째 외침인 셈이다.

재계는 이때부터 내부적으로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절차에 대해 숙의를 거듭해 온 것으로 관계자들은 전한다.

특히 노사문제와 주5일 근무제 시행, 법인에 대한 의료보험 부담 강요 등 현안에 대한 재계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선 선거철을 앞두고 공식적인 정치활동 개입이 한층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재계 전체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은 것으로 풀이된다.

엄기웅 대한상공회의소 상무는 “재계의 정치활동 개입 선언은 노사문제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정치권의 균형감각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며 “하지만 부당한 정치자금 지원 거부의 ‘외침’은 정치자금법과 부정부패 방지법 등 제도적인 장치를 능가하는 정치권력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재계로선 하루아침에 그 ‘메아리’를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반란의 변(辯)’을 대신했다.


정치개임 선언을 반전의 기회로

재계의 외침은 지난달 1일 손길승 SK 그룹 회장이 신문방송편집인 협회 초청 간담회에서 ‘정치 자금’이란 주제로 구체화되면서 마침내 정ㆍ재계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재계의 대표적 전문 경영인으로 꼽히는 그는 “정치권의 부당한 자금지원 요구에는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선 후보들이 기업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비전과 실천력을 갖고 있는지 살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적 비전을 갖춘 후보에게 재계가 공동으로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부에선 손 회장의 이 같은 소신성 발언을 놓고 “SK가 그 동안 정치권으로부터 부당한 자금지원요구를 얼마나 많이 받았기에 최고경영자(CEO)가 대외적으로 이를 천명할 정도 인가”하며 반 소신론 반 동정론의 시각이 팽배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분위기도 잠깐, ‘재계의 본산’인 전경련이 부당한 정치자금은 앞으로 재계 전체가 내지 않기로 공식 결의하는 ‘범 재계 정치선언’을 결의하면서 급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전경련 산하 한경연은 한발 더 나아가 이색제안까지 내놓았다. 정치인들을 향해 ‘그간 조성한 불법 정치자금에 대해 고백성사를 하고 사면 받으라’고 촉구한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의 반응은 마치 재계의 이 같은 외침을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의 차원을 뛰어넘어 정치자금 문제를 한 층 구체적으로 다룰 현실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나섰다.

김 대통령은 “전경련이 비합법적인 정치자금을 주지않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라며 “정치자금 부패척결을 위해선 전자정부, 국세청의 카드 사용 독려, 시민단체와 (활동을) 같이하는 것, 실명제 등 제도적인 부패방지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진 념 부총리겸 재정경제부 장관까지 가세해 법인세의 1%에 해당하는 세금을 정치자금으로 지원해 선거공영제를 시행하는 방안을 공론화 시키고 나섰다. 재계로부터 시작해 청와대와 정부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자금 화두는 결국 민주당 대권 경선 주자인 김근태 민주당 의원의 권노갑 최고위원 정치자금 ‘고해성사’(?)로 까지 확산됐다.

또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의 탈당선언 이후 정국에 정계개편의 기운이 감도는 시점에 맞춰 공교롭게도 대선주자의 공약을 평가하는 재계의 정치활동 개입 선언이 잇따랐다.

Y대의 한 정치학 교수는 “재계의 정치자금과 관련한 일련의 사안들이 마치 잘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키듯 일관되고 연속성 있게 진행됐다는 점은 특이한 사항”이라며 “이해득실을 누구보다 잘 판단하는 기업가들이 불법 정치자금을 공론화 시킴으로써 과연 무엇을 얻을 것인지는 자명한 상황에서 굳이 이를 들쳐낸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대선주자 공약평가 등 재계의 정치활동 참여 선언은 결국 정치자금을 무기로 재벌위주, 기업의 입장을 관철시키겠다는 이익집단의 이기주의적 표출”이라며 “경제 단체들이 이익집단의 입장을 떠나 나라 경제를 위한 평가작업을 하겠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좌표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재계 2, 3세 경영인 "불법 관행 종식시켜야

“기업 총수들이 정치권의 정치자금 부탁을 피해 타의로 외유에 나서는 코미디 같은 일은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 동시에 기업들도 ‘줄서기’, ‘보험 들기’, 정치세력과의 ‘짝짓기’등의 관행을 스스로 종식시켜야 한다.”(K사 K 전무)

매주 목요일 밤 서울 중구의 S호텔 비즈니스센터의 특별 세미나 룸.

최태원 SK회장을 비롯 신동빈 롯데 부회장과 이웅렬 코오롱회장, 김원 삼양사 사장, 이용순 삼보컴퓨터 회장, 류 진 풍산 회장, 김 준 경방 전무,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 등 재계의 내로라는 2,3세 경영진들이 한데 모여 글로벌 환경 속에서 기업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전문 연사초청 강연을 시작으로 각종 정보교환과 토론이 뜨겁게 벌어진다.

이들의 공통점은 30ㆍ40대초반의 2,3세 경영인이라는 성장 출신배경 외에 국내의 유수대학을 졸업하거나 미국의 유명대학에서 경영학 석사이상을 받은 고학력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기존 창업 1세대들과는 달리 현실정치 상황에 대해선 별 관심도 흥미도 없어 보인다.

특히 선거철을 앞두고 정치자금 문제는 이들의 공식적인 토론석상에선 불문율로 통할 정도다.

이 모임에 참석하는 한 관계자는 “요즘 같이 정치의 계절에도 대화의 관심사는 주로 어디에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을 것인지에 집중된다”며 “중국과 미국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선 과연 어떻게 현지 파트너를 만들 것인 지부터 벤처 기업과의 사업연계 방안까지 구체적인 논의가 주류”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비공식적인 석상에선 가끔 정치인에 대한 얘기 하지만 이중 열에 아홉은 낯선 국회의원이 정치자금지원 요구를 해올 때 어떻게 예의 바르게 거절할 것인 가하는 기술적인 방법을 선배가 가르치는 경우”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재계의 정치활동 개입에 대해선 극히 반응을 자제하며 ‘불필요한 정치적 제스처’라는 식의 시큰둥한 반응마저 보였다. 기업이 정치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선거철을 앞두고 재계의 부당한 정치자금 지원과 대선주자 공약 검증을 통한 정치참여 개입 선언 배경을 놓고 갖가지 해석이 일고 있다. 하지만 그 효과는 현실적으로 하루 아침에 이뤄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재계의 이번 외침이 이들 2, 3세대 경영진들에게까지도 한 철 ‘봄바람’으로 느껴질 정도이기 때문이다.


* 경제단체의 정치관련 발언일지

1월10일 전경련 ‘정치논리가 경제흐름 왜곡시켜선 안 된다’ (회장단 회의) 2월8일 전경련 ‘부당한 정치자금은 안 내겠다’(회장단 회의) 2월22일 전경련 ‘부당한 정치자금 제공 거부 및 선심성 정책 배제 촉구’ (정기총회에서 채택한 기업인의 결의) 2월28일 중견기업연합회, ‘선심성 공약 남발 자제촉구’(정기총회) 전경련, 부당한 정치자금 제공 거부방침 재확인 (구조조정본부장 회의) 3월4일 경제5단체, 대선 후보 공약평가 발표 (경제단체 협의회 정기총회에 앞서 채택한 경제계 제언‘

장학만 주간한국부 기자 local@hk.co.kr

입력시간 2002/03/1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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