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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에 홀린 한국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한국판, 폭발적 인기몰이로 공연계 새 지평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the Opera)’의 한국판이 펼쳐지는 무대에는 세 개의 시ㆍ공간이 뒤얽혀 존재한다. 사람들에겐 그 화려한 혼재가 즐겁다. 객석은 극장 R석에서 C석까지 골고루 차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 아트 센터는 2002년 쌀쌀한 초봄, 유령이 출몰하고 있는 곳이다. 이것은 첫째의 시공, 현재다. 세계에서 14번째, 자국어로 ‘팬텀’이 상연되고 있는 곳이다.

유령은 죽음의 이미지를 극장 곳곳에 살포하면서, 1889년 파리 오페라 하우스 안의 음지를 탐닉한다. 사랑을 이루지 못해 구천을 떠돌고 있는 유령이다. 두 번째 시공, 무대 위의 현재다.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고대 이집트 황실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한 화려한 오페라가 상연되고 있다. 무희들의 요염한 군무가 19세기말 유럽의 세기말적 환락과 뒤엉킨 곳이다. 셋째 시공, 무대 속의 무대다.


관객의 의식을 사롭잡는 연출기법

무대와 객석 사이 오케스트라 피트에 자리 잡은 오케스트라가 잘 알려진 테마 음악을 조금씩 연주하면서 분위기를 돋운다. 뮤지컬 하면 록 반주의 무대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클래식을 주조로 하는 뮤지컬 무대는 우선 통념을 깨준다. 객석의 기대감은 음악 따라 슬슬 올라간다.

무대의 조명이 하나 둘씩 켜지면 보물 경매장이 나타난다. 원숭이 인형, 흔들의자 등이 경매 중개인의 기괴한 목소리로 팔려 나간다. 그러다 중개인이 무대 맨 앞 짙은 회색 휘장으로 덮여 있는 커다란 물건을 가리키면서 그 음산함은 돌연 전율로 뒤바뀐다.

휘장이 벗겨 지더니, 쇠줄에 딸려 올라가는 그 물건은 초호화 샹들리에다. 한때 귀족의 무도회장을 찬란하게 비췄던 샹들리에는 이제 낡아빠져 경매장 매물로 나앉게 된 것이다. 길이 12㎙의 샹들리에는 쇠줄에 딸려 천정까지 올라간다. 곱게 올라가지 않고 굳이 좌우로 흔들흔들 올라가는 그 모양에, 관객은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다.

극장 천정까지 올라가던 호화 샹들리에는 그제서야 상승을 멈춘다. 객석은 목을 끝까지 젖혀 가며 지켜 본다. 의식의 표를 찌르는 도입부다. 무대는 관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

우선 순식간에 바뀌는 배경 때문이다. 이걸 보고 있다 싶으면, 어느새 저것으로 바뀐다. 또 하나, 천정에 내걸려 있는 대형 샹들리에가 수시로 흔들흔들 거리는 바람에 객석의 의식은 편치 못 하다. 극을 더욱 생동감 있는 현실로 바꾸기 위한 제작진의 전략이다.

길이 20여㎙의 쇠막대기에 족자처럼 걸쳐져, 막대를 올리고 내림에 따라 배경막 그림이 바뀐다. 고대 이집트 시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오페라 무대다. 음울한 경매장이 그처럼 오페라 무대로 돌변하는 것은 이집트나 유럽의 살롱 풍경 등 상황에 맞게 배경막이 신속하게 출몰하는 덕이다.

무대 위의 상황은 그렇듯 어느 것 하나 계산되고 연출되지 않은 것이 없다. 샹들리에의 덜그럭거림, 어둠 속 발레리나들의 무용 장면 등 부수적 대목까지 예민한 관객들을 위해 정교히 만들어졌다.

특히 2막의 도입부, 이 뮤지컬에서 가장 화려한 볼거리로 떠오른 계단 장면이 그렇다. 10분 휴식으로 산만해진 관객들의 집중력을 단 한 번에 붙잡는 효과적 수단의 역할을 하는 대목이다. 30여명의 배우가 화려한 계단 위에서 무도회 노래에 맞춰, 제각기 한껏 성장하고 전성기 유럽의 귀족 문화를 재현한다.

그들의 포즈는 각각 다르다. 각각 하나씩의 캐릭터를 마임으로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뮤지컬 ‘캐츠’의 집단 출연 대목에서, 배우들의 고양이 흉내가 어느 누구도 비슷하지 않은 상황과 흡사하다. 충분히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을 5분 여의 계단 대목은 그래서 살아 있는 하나가 돼, 좀체 볼 수 없는 호사를 연출한다.


대성공 밑바탕엔 신선한 얼굴 캐스팅

극에 객석이 몰입하게 만드는 것은 처절한 삼각 관계 때문이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삼각 관계란 엇갈림은 유효한 소재다.

‘유령’ 역시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현실과 몽환의 두 남자를 애인으로 둔 운명의 여인 크리스틴,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 간 오페라의 유령, 둘의 사랑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청년 라울, 사랑의 삼각 관계는 그렇게 이뤄진다. 그러나 무대 위의 승부는 배우의 역량에 달린 법이다. ‘유령’의 성공은 오디션의 승리이기도 하다.

삼각 관계 당사자를 뽑기 위한 오디션은 지난해 5~8월 석 달 동안 펼쳐졌던 접전의 현장이기도 했다. 열띤 경쟁끝에 크리스틴(이혜경ㆍ김소현), 라울(유정한)이 먼저 발탁됐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강력한 카리스마, 팬텀을 연기할 배우가 쉬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강력한 카리스마에다 애절한 비원을 동시에 체현해 내는 작업은 배우에게 많은 연기량을 요구하는 것이다. 게다가 잘 알려진 뮤지컬 스타는 요즘처럼 뮤지컬에 관한 한 일가견을 이룬 한국의 마니아들을 식상케 할 소지마저 있다.

이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카드가, 말마따나 유령처럼 나타난 윤영석(32)이다. 그것도 단역을 뽑기 위한 캐스팅이었다.

지난해 9월, ‘유령’의 단역 오디션장은 윤영석이라는 뜻밖의 보물을 건져올린 기쁨으로 술렁였다. 심사를 위해 미국측 제작사인 RUG(Really Useful Group)에서 파견돼 온 연출자 아티 마셀라는 “여기, 우리 유령이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프로듀서 캐리도 “지금껏 서울 오디션서 본 사람 중 제일 낫다”며 맞장구 쳤다.

맑고 깨끗한 외모에 팬텀의 어둠과 잔혹성을 동시 연기해 낼 역량 때문이었다. 연기뿐 아니다. 무거운 바리톤면서도 경쾌한 음색이 묘한 호감을 주었던 것이다.

특히 밝은 얼굴의 그에게 잠재해 있던 악마성은 그대로 팬텀 역에 적격이었다. 격렬한 앙모, 아니면 화해할 수 없는 증오, 가진 것이라곤 그 둘뿐인 인물로 거듭난 것이다.

독재자 네로나 히틀러가 극단적으로 분열된 성격의 소유자로서 후세에 악마적 영감을 주었던 것처럼, 1911년 프랑스 작가 가스통 루르가 창조해 낸 유령은 1세기를 뛰어 넘고 부활했다. 2세기 전의 일이다.

그는 1880년대 파리, 번창하고 있던 오페라하우스에서 벌어진 기괴한 사건 소식을 알게 된다. 그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이 그래서 출판됐다. 사람들은 소설속의 기괴한 분위기에 빨려 들어갔다. 머잖아 사람들의 환상은 현실이 됐다.

1925년 같은 이름의 제목으로 스크린에 올려지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잔인하고 무서운 경험”이라면서도 극장으로 향하는 발길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얀 색의 반쪽 가면으로 항상 얼굴을 가려야 했던 이즈러진 얼굴의 사나이, 바로 세기말 암울한 분위기로 치닫던 유럽의 정서였다.

그러나 21세기 초 소비의 도시, 서울은 데카당스적 이미지를 달가와 하지 않는다. 지금 서울의 관객들은 이 작품을 엽기라는 코드의 하나로서 즐기고 있다. 세상이 잊어버린 자와의 사랑, 죽은 천재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은 곧 잊어버린 옛 이야기를 다시 들려 주는 것이다.


유령과 인간의 삼각관계

극은 말미에 이르러 팬텀의 팔을 들어준다. 그것은 곧 현세에서 이루지 못 해 더욱 영원한 사랑이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철제 빔을 타고, 어린이들이 내려 온다. 그들은 바닥에 내팽겨진 팬텀의 마스크를 보게 된다. 한 아이가 마스크를 소중히 보듬는다.

8시에 시작한 뮤지컬은 10분의 휴식을 거치고, 밤 10시 35분에 모두 끝난다. 물론 그 뒤에는 출연진의 인사와 몇 차례 커튼 콜이 기다린다.

남편과 함께 온 주부 임인숙(43)씨는 “여타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하고도 섬세한 무대”라며 “여러 사람이 엇갈려 노래를 부르는 중창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2부의 내용이 잘 와 닿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임씨는 그러나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더 오고 싶다”며 작품에 애착을 표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뉴욕 브로드웨이 머제스틱 극장에서 본 영국 RUG팀의 ‘유령’에 비겼을 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그것은 기술적 문제다.

팬텀이 자신을 추격하는 사람들을 마법의 불로 위협해 내쫓는 대목에서 불꽃은 힘없이 떨어져, 상황의 긴박감을 현저하게 떨어뜨린다. 또 팬텀과 라울이 오페라 하우스 지붕 위로 올라가 사랑을 속삭일 때, 둘을 둘러싼 야경의 사실성은 뉴욕 버전의 정교함 보다 한 수 아래다.

보다 완성도 있는 한국판 ‘유령’을 향해, 주최측인 제미로는 수정ㆍ보완을 계속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대박- 25만영 볼 듯

‘유령’의 승리는 공연장밖, 기념품 판매대에서도 우선 체감됐다. 4종의 T셔츠, 음반, 기념 머그 컵, 호화 인쇄의 프로그램 등이 쉴틈없이 팔려 나간다. 특히 미국에서 제작, 온도 변화에 따라 유령의 마스크가 엷어졌다 짙어지는 머그 컵(개당 1만원)의 경우는 하루 20여개는 족히 나간다. 주요곡 수록 음반도 인기 품목이다.

2001년 12월 2일 서울 초연 이래, 일단 오는 6월까지 공연키로 된 이 작품은 무엇보다 제작 규모면에서 국내 연극ㆍ뮤지컬계의 새 지평을 열었다. 7개월 공연에 총 제작비 1백10억원 규모다.

그 가운데 호화 샹들리에와 움직이는 다리 등 특수 장비를 미리 꾸미는 데 50억원, 이후 1차 공연이 막 내릴 때까지 드는 무대 유지 보수 비용이 60억원. 총 제작비 1백10억원이 그래서 산출된다.

TV, 잡지, 인터넷(기존 사이트에서의 배너 광고 등), 스트리트 페이퍼 등 가능한 홍보 수단을 총동원, 사람들의 관심을 점령해 가자는 제작사측의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1월과 2월 입장권은 각각 3만 4,000여장, 2만 7,000여장씩 팔렸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85억원이다. 총제작비는 건지고도 남은 셈이다. C석에서 R석까지의 입장가를 8만 5,000원으로 잡았을 경우, 6월말까지 90% 이상의 객석 점유율을 유지할 경우 적어도 25만 명은 ‘유령’을 보게 된다는 계산이다.

성공은 예정돼 있었다. 개막하자 마자 12월분 티킷이 동났음은 물론 얼마 안 돼 동명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1위로 급상승했다.

‘유령’은 오는 6월 공연이 끝날 때까지 회당 평균 유료 관객의 객석 점유율이 90%를 유지하면 모두 18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할 전망이다.

제작비를 빼고 난 수입은 70억원이 된다. 여기서 기업 협찬금과 기념품 판매금 등 부대 수익이 추가될 경우, 시너지 효과가 더해진 총수익의 규모는 어느 정도가 될 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03/13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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