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독립 가능할까] 韓銀, 이번엔 독립시키자

중앙은행 위상 확립 결과 선결 과제는 총재 임기보장

“대통령이 누가 되던 그린스펀만 있으면 된다.”

2000년 11월. 조지 W 부시-앨 고어간의 미국 대통령 선거개표 혼란을 바라보는 주식 투자자와 금융계의 눈길은 시큰둥 하기만 했다.

백악관 주인이 누가되던 실제로 미국의 경제정책을 펴고 주식시장을 움직이는 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이지 대통령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바뀌는 것 보단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이 금리를 더 낮출 지에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처럼 중앙은행 총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총재 임기 보장은 한은 독립의 상징적 의미

한국은행 21대 총재의 임기가 이 달 말 만료된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각 분야에 정치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가운데 한은에도 심상치 않은 회오리가 몰아칠 조짐이다. 정권 교체가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후임 한은 총재와 금융통화위원 임명을 둘러싸고 중앙은행 독립 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오고 있다.

특히 1997년 한국은행법 개정 이후 한은의 독립 문제는 수면 하에 있어왔다.

올해로 창립 52주년(6월 12일)을 맞는 한은은 매번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법정 임기와는 무관하게 총재의 얼굴은 수시로 바뀌어왔다.

가깝게는 문민정부 출범(1993.3.조 순)부터 3ㆍ5ㆍ6공 군사정권(1963.3.이정환ㆍ1988.8.박성상 총재 등) 시절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총재가 교체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 5ㆍ16 군사 쿠데타(1961.5.전예용)와 4ㆍ19 혁명(1960.5김진형), 심지어는 장 면 내각 출범(1960.9.배의환 총재) 당시에도 ‘정권교체=한은 총재 교체’라는 일상의 등식을 이뤄왔다.

따라서 이번 22대 총재 인선을 놓고 1년짜리 과도기 ‘징검다리 총재’의 등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학ㆍ관ㆍ재ㆍ금융계 전반에 높다. 한은 총재의 4년 법적 임기 보장이 없이는 중앙 은행의 독립은 한마디로 물거품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한은 총재 임기 중에도 마음대로 바꾸는 일이 관행처럼 자행됐다. 정권교체기는 물론 총재 재임 중 장관으로 입각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금융계나 학계에선 이를 결코 영전으로 보지 않았다. 당시 한은을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고 부를 만큼 중앙은행의 위상과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다.”(유동길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중앙은행 독립에 대한 화두는 우선 한은 총재의 임기 보장으로부터 출발한다. 정권의 향배에 따라 한은 총재가 바뀐다면 중앙은행의 독립은 꽃샘 추위에 꽃 망 물도 터뜨리기 전에 지는 봄 잎새에 불과하다. 한은 총재 인선은 단순한 인사문제가 아니라 중앙은행 독립의 상징적 의미로 부각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한은 역사 52년간 법정임기 4년을 채운 총재는 전철환 21대 현 총재를 포함, 1980년대 김 건(17대)과 70년대 김성환(11대) 전 총재 등 강산도 변하는 10년에 한 명 꼴로 모두 5명에 불과하다.

결국 총재 한 명 당 평균수명은 2.4년으로 법정임기를 반쯤 채우는 것이 ‘평년작’인 셈이다. ‘인사는 만사’란 말을 비웃듯 한은 총재의 임기는 유난히 정치바람을 타는 자리라는 것이 관행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1990년대 문민정부 시절역대 한은 총재중 제대로 임기를 채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우리나라 통화신용정책을 이끌고 있는 한은의 현주소다. YS정권이 들어서면서 조 순 전 총재가 교체됐다.

후임 김명호 전 총재도 금융사고로 도중 낙마했고 다음인 이경식 전 총재는 외환위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이는 1987년 도널드 레이건 정부 당시 공화당 출신으로 취임한 그린스펀 의장이 빌 클린턴 정부를 거쳐 조지 W 부시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절대적 권위를 누리며 15년간 장수하고 있는 것과는 큰 대조를 보인다.

금융계에서는 벌써부터 후임 한은 총재 임명을 놓고 차기정권에서 바뀔 것을 염두에 둔 정부 측근 인사가 낙점됐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그러나 현 정부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만 확고하다면 집권말기 정파적 이해에 따른 ‘낙하산 인사’ 보단 능력과 소신을 갖춘 각계로부터 존경 받을 만한 민간출신의 금융전문가를 총재로 임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한국은행 노동조합이 여론조사 기관인 한길리서치를 통해 경제전문가 21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중 9명이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4년 임기의 보장이 반드시 필요하며 어떤 정파와도 관계없는 합당한 인물이 총재로 임명돼야 한다’고 응답했다.

또 한은 총재가 갖춰야 할 주요 덕목으로는 ‘통화신용정책에 대한 전문지식과 현실감각(70%)’이 가장 많았고 정부로부터의 부당한 간섭에 ‘노(No)!’라고 거부할 수 있는 소신(56.2%)’ 순으로 나타났다.

권영준 경실련 정책협의회 의장(경희대 국제경영학 교수)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감히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그런 ‘경제 대통령’을 뽑는 것이 중앙은행 독립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며 “총재의 권위와 위상회복이 곧 한은 독립의 절반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돈다

올 연초부터 한은 독립을 향한 강렬한 기운은 예사롭지 않게 산 꼭대기에서부터 감돌았다. 전철환 총재는 1월3일 한 케이블 TV 방송 프로에 출연, “통화정책의 중립성 제고를 위해 한국은행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 마디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전 총재의 목소리는 특유의 저음에도 단호했고 분명했으며 강렬한 호소력을 담고 있었다.

그는 “현행 한은법상 금융통화위원회 의결사항에 대한 재경부 장관의 재의(再議) 요구권과 재경부 차관의 열석(列席) 발언권, 재경부의 한은 경비예산 승인권은 없어도 충분하다고 본다”며 속에 쌓아둔 응어리를 풀 듯 조목조목 열거했다.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통화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통화신용 정책과 결제업무, 외환업무에 대해 필요할 경우 한은이 금융기관을 직접 검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 총재의 발언은 1997년 한은법 개정이후 통화신용정책의 최고의사 결정 기구인 금통위 의장직을 재경원 장관으로부터 한은 총재가 맡게 되는 등 외형상 독립적인 모양새를 갖췄으나 여전히 중앙은행에 대한 정부의 간섭시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제 2독립’의 당위성을 밝힌 셈이다.

재경부는 한은법상 한은 경비 예산 승인권은 물론 금통위의 의결사항을 반대할 경우, 이를 재검토하게 하는 막강한 재의권을 행사할 수 있어 중앙은행의 중립성을 제어하고 있다.

이승일 한은 부총재보는 “미국이나 영국 등 어느 나라에도 중앙은행의 경비예산 승인권을 재무부가 쥐고 있는 경우는 없다”며 “단 일본의 경우 재무성의 예산승인을 받고 있지만 이를 거부할 경우 내용을 공표하기로 돼있어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일 뿐 ”이라고 한은의 특수한 환경을 설명했다.

재경부는 특히 금통위 회의가 열리기 이틀 전 회의내용을 재경부 차관이 사전 보고 받는 열석 발언권을 가져 회의가 열리기 전 정부 관계자가 한은의 고유 권한인 금리와 관련한 내용을 사전에 흘려 시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한 증권사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지난 한 해에만 재경부와 당정 등의 금리발언으로 증시를 일 순간 흔들리게 만든 대표적인 사례가 무려 14차례에 달할 정도였다.

“재정 금융정책과 통화정책이 박자를 맞춰야 하며 최근의 경제상황과 경기대책에 대해 한은 총재가 (콜금리 인하)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2001.8.9 진 념 재경부 장관 기자간담회) “한은에 콜금리를 추가 인하해 줄 것을 요청할 방침이다.”(9.2 재경부 관계자)

“현 상황에서 저금리 효과를 자신할 수 없다.”(10.10 재경부 관계자) “경기가 바닥을 쳤다고 볼 수는 없다.”(11.1 재경부 장관) “금통위가 4,5월 금리인상 문제를 두고 고심하게 될 것이다.”(2002.3.13 장승우 전 금통위원 현 기획예산처 장관 대한상의 오찬간담회)

증권사의 투자분석 이사는 “재경부 장관이 금리수준을 결정하는 금통위 회의 바로 전날에 금리인하를 예단하는 발언을 한 것은 금통위(한은) 권한의 중대한 침해로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는 중앙은행의 신뢰도 추락은 물론 정부의 관치금융 작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라고 꼬집었다.

변성식 한은 노조 위원장도 “금통위원 들의 급여를 주고 금통위원 구성원의 다수를 재경부 출신 또는 재경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인물로 채우고 있는 상황에서 금통위의 결정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짙게 배어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조 측은 재경부와 대한상의, 한국증권업협회, 은행연합회 등이 추천,임명하는 금통위원 6인 중 현재 절반이 통화신용정책에 대한 전문성과는 무관한 재경부 출신인사가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 새로운 금통위원 인선에 민간단체의 추천권이 자율적으로 행사하지 못할 경우 새로 임명될 금통위원에 대한 출근저지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은법 개정안 정치바람 탄다?

올 6월 12일 한은 창립기념일을 맞아 중앙은행 독립성을 저해하는 현안들을 포함한 한은법 재 개정을 위한 한은 제2독립 운동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1997년 한은법 개정이후 꼭 4년만의 재 독립 선언이다.

한은 노조는 시민단체와 공동으로 한은법 개정방향에 대한 세미나 개최와 가두 캠페인 등을 통해 시민 연대회의를 구성, 입법 청원 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대선과정에서 한은법 개정안이 각 당 후보진영의 공약에 반영할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결국 대선정국에 한은법 개정안 역시 또 하나의 정치적 화두로 떠오르게 되는 셈이다.

시장에선 그 동안 한은의 콜금리 결정이 물가안정 목표달성을 위해 선제적으로 시의적절하지 못했고 시장변화에 다소 무심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제도상이나 운영과정에서 정부의 입김 때문인 것도 있지만 한은 스스로가 주어진 권한을 충분히 행사하지 못했다는 질책도 받고 있다.

그러나 통화신용정책에 경제외적 논리가 지나치게 개입될 경우, 최근과 같은 부동산 투기 조장과 가계대출의 부실화, 부실기업의 특혜, 중소기업의 몰락 등 막대한 경제적 피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확산된다.

관치금융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의 정부정책에 대한 적절한 견제역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제도ㆍ관행적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우선적으로 보장돼야 한다는 대세론이 힘을 얻고 있다.

장학만기자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3/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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