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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의 문화읽기] ‘봄여름가을겨울’이 몇번이 지났건만…

책을 사러나갔던 서점 옆에 마련된 레코드 매장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의 신보를 집어들었다.

1988년에 발표된 첫 번째 앨범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를 들으며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을 예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봄여름가을겨울도 이제 15년의 연륜을 가진 밴드가 되었나 보다.

개인적으로는 1991년에 발매된 라이브 앨범이 무척이나 각별하다. 이 앨범에는 1990년 숭의음악당과 63빌딩에서의 공연이 수록되어 있는데, 필자는 63빌딩 공연에 관객으로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그래서 가끔 술이 취하면 앨범 속에 삽입된 관객의 환호성 속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고 우겨보기도 한다. 처음에는 젊은 밴드들의 앨범을 구경해 볼 심산이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늙은(?) 밴드의 앨범을 덜컥 사버리고 말았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새로운 앨범과 함께 지나간 시절의 추억들을 되짚어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 앨범의 ‘Bravo, My life’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형적인 멜로디 라인을 유지하고 있는 노래였다. 김종진의 어눌한 듯한 보컬과 전태관의 깔끔한 드럼이 보여주는 앙상블도 여전했다.

하지만 종전과는 또 다른 울림을 느꼈던 것은 이 노래가 386세대(3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의 내면풍경과 닿아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해 저문 어느 오후, 집으로 향한 걸음 뒤에

서툴게 살아왔던 후회로 가득한 지난 날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


대낮의 발랄함도 아니고 늦은 밤의 물기 어린 감상도 아닌, '해질 녘의 감수성' 속에 이들의 내면풍경이 펼쳐져 있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한낮을 거쳐온 약간의 피곤함과 지나간 시절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회한이 스며있다.

하지만 지나간 시절을 그리 좋지도 않지만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면, 이들의 세대감각이 은근하게 배어난다. 앞뒤 세대들과 비교해서 살펴보면 조금은 선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전 세대에 해당하는 최백호는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이라는 멋진 구절로 ‘낭만에 대하여’를 시작했고, 선명한 이미지들을 통해서 70년대에 대한 기억들을 이끌어냈다.

반면에 후배 격인 신해철은 "뜨겁던 내 심장은 날이 갈수록 식어 가는데 내 등뒤엔 유령들처럼 옛 꿈들이 날 원망하며 서 있네.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자국씩 떼어놓지만 갈 곳도 해야 할 것도 또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절망에 관하여’)라며 정체성의 혼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최백호가 되돌릴 수 없는 추억의 시공간을 노래했다면, 신해철은 스스로 저버린 꿈과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낭만 속에서 추억하는 일이 최백호 세대의 당당한 권리이고, 정체성의 혼란과 방향성 상실을 호소하는 일이 신해철 이후 세대에 합당한 포즈라면, 봄여름가을겨울 세대의 표정은 무엇일까.

‘Bravo, My life’에는 기억을 환기하는 선명한 이미지도 없고 정체성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도 없다. 부정적인 시선에서만 보자면, 온전한 추억도 없고 치열한 고민도 없는 상태에서 어정쩡한 표정만 짓고 있다고 할만하다.

하지만 어정쩡한 표정이야말로 이들 세대의 가장 건강한 고백이라 할 것이다. 어정쩡한 표정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황량한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여전히 채워나가야 할 그 무엇이 남아있음을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세대란 반(反)자본주의 이론을 집단적으로 학습했고 역설적이게도 시장체제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세대이다.

또한 70년대 학번 세대들처럼 촌스럽지도, 90년대 이후 학번들처럼 세련되지도 못했던 젊은 날을 가진 세대일 것이다. 해질 녘 귀가 길의 어정쩡한 표정을 두고 이들이 여전히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는 없을까. 길 찾기에 몰두하고 있는 두 젊은 중견 음악인들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tan@empal.com

입력시간 2002/03/20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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