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잔디전문가 곽희완

"잔디도 스트레스 받으면 엉망돼요"

" 4월 26일쯤 되면 파릇파릇해 질 겁니다. "

그의 봄은 잔디를 타고 온다. 4월 26일, 겨우내 빛이 바랬던 잔디도 다시 푸른 옷을 입는다. 20년 잔디와 함께 살아온 그린키퍼 곽희완(46)씨. 국내에선 열손가락 안에 드는 베테랑 잔디관리전문가중 하나다.

그는 골프장에서 일한다. 경기도 수원, 약 40만평 부지의 발안골프장이 그의 근무지다. 명칭만으론 흔히 한가로운 정원사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의 일은 예상보다 치열하다. 잔디의 생태부터 질병의 응급처치까지, 잔디에 관한 한 박사급이다. 실제로 그는 현재 단국대 대학원에서 학업중인 예비 박사다.

일년중에서도 여름은 최악의 수난기다. 수시로 오르내리는 지열에다 한밤에도 식을 줄 모르는 열대야 현상, 게다가 야간경기에 쓰이는 라이트 조명까지 더하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 항상 일기예보를 점검하는 일은 수십년째 이어온 필수업무이다.

요즘도 한 유료 기상정보업체의 예보자료를 받아쓴다. 웬만한 날씨예보는 직접 맞추기도 한다. 컴퓨터가 아니라 흙에서 배워 온 지혜다.

골프장 주변에 서식하는 곤충 물달개비의 반점 크기만 보고도 그해 장마 기간을 파악하거나 개미가 집단 이동하는 방향, 새가 날아다니는 높이만 보고도 날씨를 내다본다. 이것도 부족하면 위성사진까지 동원한다. 잔디를 지키는 일에 온 촉각이 서 있다.

" 날씨때문에 한번 큰 사고를 친 적도 있습니다. 일기예보에서 다음날까지만 비가 온 뒤 갤 거라고 해서 잔디를 비닐로 덮어뒀는데 예보와는 달리 그 후 사흘동안 계속 비가 오는 바람에 엄청난 양의 잔디가 죽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곧바로 해고감이었는데, 회장님이 저를 자르겠다고 하시는 것을 사장님이 '한번 더 기회를 주자'고 해서 가까스로 무사히 넘어갔습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

골프장내 잔디나 나무 값만 약 180억원 규모에 달한다. 유지관리비만 연간 15-6억원이 소모된다. 고임금의 관리전문가를 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회사내 수석 그린키퍼인 곽씨는 매주 한번씩 전 코스를 돌아보기도 하고, 수시로 밧데리카를 타고 다니며 간이점검을 하기도 한다. 잔디뿐 아니라 나무나 기타 조경시설 등 건물만 빼고는 모두가 관리대상이다.

" 가장 어려운 건,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잔디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 말고는 어디 하소연할 곳도, 도움을 받을 곳도 없다는 겁니다. 제겐 이만큼 좋은 직업도 없지만, 동시에 아주 외로운 직업이기도 합니다. "


못된 인간에 버금가는 고약한 잔디성격

잔디지킴이라는 뜻의 그린키퍼라는 용어는 197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도입됐다. 이전 세대에선 흔히들 '청기와 장수'로 통했다.

자신의 노하우를 아무에게도 전수를 하려들지 않는, 고집스런 폐쇄성 때문이었다. 잔디는 성질부터 보통이 아니다. 개체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인간이든 식물이든 콩나물 시루 신세가 되면서부터 문제다.

빽빽하게 심겨진 밀도 때문에 생기는 생물로서의 스트레스, 게다가 끊임없이 그 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다 원래 70cm 키까지 자라는 품종을 4mm로 깎아대는 손길 등, 그린 위의 잔디는 건강하게 자라기가 어렵다.

온,습도는 물론 비료를 주는 양만 조금 잘못돼도 곧바로 탈이 난다. 잔디가 망가지면 현실적으로도 영업에 지장을 초래해 막대한 손해를 입힌다. 그린키퍼는 사람과 자연의 중간지점에 선, 고달픈 중개자다.

" 초창기에 가장 답답했던 것은 알고 싶은 것이 있어도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청기와 장수란 별명이 그렇듯, 고참들도 그저 이건 이렇게 하라는 지시만 내릴뿐, 잔디의 병명이 뭔지, 원인이 뭔지 그 모든 지식이나 자료는 자기 책상 안에 넣고 꼭꼭 묻어둔 채 가르쳐주지 않는겁니다.

그만큼 그분들도 어렵게 터득한 것들이기도 하고, 자신의 경쟁력과도 관련된 문제니까요. 제가 자료 욕심이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 찾는 것 외엔 방법이 없으니까, 당시엔 국내 자료도 별로 없어 외국의 관련 원서들을 있는대로 사모아 공부했습니다. 현재 갖고 있는 자료들만 해도 큰 캐비닛 하나는 꽉 채울 수 있습니다. "

스스로 영원한 '촌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곽씨 자신도 들풀처럼 살았다. 대구에서 출생, 가난한 집안의 4형제중 셋째로 자라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연히 TV화면에 비친 사슴이며 들판의 풍경을 보고 농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농고에 입학해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는 과정에서 부모님 곁을 떠난 이후 그대로 가출 아닌 가출처럼 스스로 떠돌았다.

빨리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고3때 친구들 몇을 모아 팔공산내 약 34만평의 땅을 임대한 뒤 오동나무를 심었다가 당장 산속에서 먹고 지낼 쌀값조차 없어 6개월만에 손을 들고 나왔다. 자존심때문에 부모님 얼굴을 대할 수 없었다. 집 대신 찾아간 곳은 한 양산제조업체. 반년동안 새벽부터 밤까지 양산의 철제 지지대 연결부 홈을 파는 일만 했다.

77년 상주 농잠전문학교에 진학할 때엔 입학직전 친구에게 만원을 빌려 헌책방에서 사 모은 책 보따리 하나가 소지품의 전부였다. 무작정 교수를 찾아가 자신의 사정을 말한 뒤 허락받은 학교내 잠실(蠶室)에서 먹고 자며 학교생활을 버텼다. 우유배달에다 과외, 그리고 직접 개인 누에를 치며 번 돈으로 힘겹게 학비를 마련했다.

어느날 큰 사고를 당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길에 어린 중학생들이 지나가던 신혼부부의 차량에 위험한 장난을 하는 것을 보고 제지한 뒤 돌아서는데 갑자기 뒤 쪽에서 커다란 돌이 머리로 날아들었다. 끔찍한 모습으로 실려간 병원에서 '좌측 두개골 분쇄 함몰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사경을 헤매며 2번의 뇌수술을 받았다.

7년만에 졸업한 2년제 전문학교, 그러나 졸업시 과수석을 차지해 농업관련 기업에선 당장에라도 채용할 의사를 보여왔지만 이것을 마다하고 2년이나 기다린 건 한 은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린키퍼 일자리를 기다리는 동안 지방에 취업한 한 친구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밥을 해주기도 했고, 그 친구마저 결혼해 갈 곳이 없었을 땐 한 방직공장에 취직해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다.

1984년 H컨트리클럽이 개장되면서 마침내 그린키퍼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자연 속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 천상 흙과 식물을 좋아하던 그에겐 최상의 직업이었다.


회사 소유주 바뀌었다고 사표 낸 의리파

말단으로부터 시작된 첫 직장생활. 정말 지독하게 일했다. 남들이 출근하기 2시간 전인 새벽 6시부터 나와 그는 회사 마당을 쓸고 있었다. 먹고 자는 것도 회사 숙직실에서 해결, 밤 늦게까지 일하기엔 오히려 좋은 여건이었다. 그런 시간이 2년쯤 흐르자 평균 10년이 걸린다는 부서장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왔다. 한편으론 또 다른 덫이기도 했다.

" 그땐 정말 눈에 보이는게 없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참 한심한 일이지만, 내가 최고인 것 같고, 뭐든 내가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 겁니다. 원하는 것을 너무 빨리 이루다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내가 과연 뭘 아는 것이 있나, 생각할 때마다 부끄럽고 멍한 데 말입니다. "

경영난으로 회사의 소유주가 바뀌게 되자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표를 내밀고 나왔다. '아무리 하찮은 월급쟁이라도 한 자리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남들이 웃든 말든, 그건 우직한 촌사람 곽씨의 진심이었다.

팀장의 직위를 약속받고 옮겨간 G골프장. 그러나 입사후 내부사정으로 인해 과장이 아닌 과장대리의 직급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러나 일면 축복이었다. 다른 사람의 아랫자리에 있어보면서 다시금 자신이 아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 자신이 최고란 생각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겸손의 아름다움을 배운 이 시절의 교훈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처음으로 '그린키퍼협의회'를 창립하고 초대총무로 일하는 과정에서 회사측의 압력으로 쫓겨나듯 직장을 그만뒀다. 그 일만 포기하면 차장으로 진급시켜주겠다는 회유 대신 선택한 길이었다. 갑자기 실업자 신세가 된 채 무작정 여행비 500만원을 마련해 일본을 찾아갔다.

당시 국내에선 최고의 권위자로 소문 나 있던 일본의 한 잔디전문가를 만나기 위해서 였다. 사전 예약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시간이나 혼자 세워둔 뒤에야 나타난 그 권위자는 그러나 권위자로서 기대했던 지식수준과는 달리 실망만 안겨주었다. 줄곧 잔디분야의 최고 학문으로 흠모해왔던 일본 학문을 비로소 접어넣었다.

연이어 찾아간 미국에선 몇 주간 골프장만 찾아다녔다. 잔디상태를 관찰하는 한편 직접 실무자까지 만나 세세한 관리기법까지 물어보았다. 국내의 방식과 대조하며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여행이 끝날 무렵, 비로소 세상에 눈이 뜨이는 것 같았다.

돌아온후 얼마 뒤 현재의 근무지로부터 입사제의를 받고 인연을 맺었다. 그 후 몇 번의 이동을 거치는 도중, 한참동안 접어두었던 공부욕심이 다시금 솟구쳤다. 어려서부터 워낙 어렵게 이어온 배움의 한 때문에 차라리 그 참에 한번 끝을 내보리라 결심했다.

1남1녀의 아버지로서 느끼는 정신적인 책임감, 게다가 그 한두해전에 등장한 잔디연구소의 출범은 그에게 위기감과 함께 새로운 분발을 서두르게 했다.

우직한 '곽희완식' 도전이 재연됐다. 낮에는 낮대로 직장인으로 일하면서, 수원 인근 대학도 아닌, 자동차로 약 네시간쯤 달려야 갈 수 있는 경북 상주산업대 야간반에 편입, 일주일에 사흘씩 왕복 8시간여를 오가는 통학생활을 2년간 계속했다.

코피를 쏟기도 여러 번, 위험한 심야 국도에서 사고를 당할 뻔한 일도 수차례 있었다. 대학졸업장을 마침내 쥐었을 때, 자신이 몰던 차는 폐차 직전의 고물이 돼 있었다. 이후 97년 단국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 국내에선 보기드문 토양 관련 잔디 육종 연구 분야로 현재도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명실상부한 잔디박사로서 더 굳은 땅을 다져가는 중이다.


“돈 많이 벌면 후배들 돕고 싶어”

몇해째 그가 소년소녀가장을 도와온 사실은 지금도 가족들조차 모르고 있다. 가난하고 고통스럽던 성장기,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었던 많은 은사들과 친구, 주위 사람들에 대한 보답으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찾아 작으나마 자신의 능력에 맞게 조용히 아이들을 후원해왔다.

" 앞으로 돈을 더 많이 벌어 후배들도 돕고 싶습니다. 좋든 싫든, 저를 믿고 따라와서 고생하는 후배들, 제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 저는 바보인가 봅니다. 남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취재전 그와 약속했던 사항을 어긴 것에 대해 곽씨의 양해를 구해야겠다. 그는 '전문가'란 호칭이 과분하다며 스스로 '돌팔이'로 고집스레 자신을 낮췄다. 잔디밖에 모르는 돌팔이에다 촌사람 곽씨, 흙먼지 뿌연 그의 밧데리카가 혼자 문 밖에 서 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3/2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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