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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소설가 조정래

"계급·사상과의 격렬한 싸움이었소"

한껏 오른 하늬 바람이 가오리연 꼬리를 쉼 없이 채근하고 있던 어느 봄 날. 물색 부드러워진 한강을 바라보는 작가 조정래(59)의 눈가에는 이슬이 살짝 내려 앉았다.

대하소설 ‘한강’은 그에게서 발원해, 마침내 한민족에게 격동의 현대사를 새삼 인식시키더니 깊은 감동으로 각인됐다.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중첩된 자리, 우리 시대 한국인이 버텨내야 했던 격렬한 시간들이 바로 거기 있었다.

“1월 17일 마지막 종지부를 찍고 나서야, 반년 넘게 참아 온 수술을 받았죠.“ 조정래에게 소설 ‘한강’의 시간은 그렇듯 더도 덜도 말고 육체와의 전쟁이었다. 개복하고 보니, 상태는 훨씬 심각했다. 심한 탈장이었다.

발병 사실이야 지난해 6월 알았지만, 수술 받으면 적어도 2개월 동안은 집필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7개월 동안이나 몸을 달래며 참아 왔던 것이다. 소설 쓰느라 너무 오랫동안 앉아만 있다 보니.

장을 떠받히는 복강막이 내장의 하중을 견디다 못해 쏟아져 버렸다. 스스로 작가의 직업병이라 부르는 탈장 수술은 이전에 다섯 차례 받았지만, 이번 것은 혹독했다.

그 수술은 모두 합쳐 2백자 원고지 51,500장이라는 엄청난 작업이 부과했던 과외의 통과 의례였던 셈이다.

‘태백산맥’(16,500장), ‘아리랑’(20,000장), ‘한강’(15,000장) 등 세 편의 원고를 한 번 쌓아 놓고 보니, 높이만 5m50㎝였다. 언론이 ‘한국 근현대사 100년 3부작’이라 화답했던 대역사 다운 덩치였다. 등장 인물의 수로만 따진다면 ‘태백산맥’이 270여명, ‘아리랑’은 560여명, ‘한강’은 500여명.

전작들보다 ‘한강’의 시공은 훨씬 확장됐다. 등장 인물들은 거의 동시대를 살았거나, 살고 있다. 500여명의 등장 인물 중 배우 김성호, 코미디언 서영춘 등 150명의 실제 인물을 냉정한 현대사의 격류속에서 지켜 본다는 사실은 동시대 독자들에겐 각별한 감흥으로 다가왔다.

전태일, 김진홍 목사,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 등 굵직한 획으로 각인된 인물들이 ‘한강’이란 이름의 만인보(萬人譜)에 등장했다.


세대간 간극 좁히며 흐른 ‘한강’

“몇 년전부터 현재가 마치 박정희의 공인 것 처럼 호도돼 가는 시점에서, 우리 시대의 뿌리를 돌아다 보자는 거지요.” 이 시대는 해외 노동자들이 엄연히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망각해 버렸다는 것이다.

‘한강’은 X-세대다 뭐다해서, 갈수록 심해져 가는 세대간의 간극을 메꾸는 역할을 해 내는 데도 손색 없다. 신문 연재 중 ‘한강’을 읽게 된 독자들의 전화가 꼬리를 물었다.

기성 세대는 “아이들이 부모 세대의 가난을 믿기 시작했다. 빨리 단행본을 내달라”며 채근했고, 인터넷 공간속의 청소년 독자들은 “부모 세대가 정말 위대해 보인다”며 그들의 담론장을 달궜다.

현재 ‘아리랑’은 프랑스 출판사 ‘이르마땅’에서 7권까지 번역돼 나왔다. 한국인 부인(변데레사)을 얻어 17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파리 제 7대학 한국학 교수 지벨 메이어씨가 작업중이다.

한국적 상황의 이야기지만, 치밀한 역사적 고증과 보편적 이념의 격돌상 덕에 그의 작품은 외국어의 옷을 입어도 거북살스럽지 않다. 즐겨 외국어로 번역되는 이유다.

한민족의 정서로 세계사적 사건을 풀어가는 그의 작품이 외국어로도 옮겨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유형의 땅’은 불어로, ‘불놀이’는 영어와 불어로, ‘박토의 혼’은 독일어로 번역됐다.

특히 ‘태백산맥’은 일본인 번역가 4명이 매달려 일어로 완역됐다.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최대의 백과사전이라는 찬사와 함께.

“앞으로의 주제는 공해 문제 같은 범인류적 차원으로 옮아 갈 작정입니다. 작가로서는, 민족적 문제가 마무리됐다고 보기 때문이죠.” 3부작을 완성한 이제, 조씨는 20년 동안 밀쳐 두었던 범인류적 주제에 주력할 생각이다.

“21세기의 가장 큰 재앙은 공해, 국가 이기주의, 인종주의라고 봐요. 냉매로 쓰이는 프레온 가스 문제 등의 배후에는 언제나 미국의 비열한 행위가 도사리고 있잖아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전세계 지식인의 통렬한 자각과 연대가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구라는 배에 동승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죠.”

본인의 뜻이야 어찌됐든, 그는 분명 인기 스타다. 인터뷰중인 조정래를 보고, 동년배의 남자가 다가 와서 사인을 청했다. 59세로 사업 와중에 ‘태백산맥’을 독파했다는 그 사람에게 작가는 환히 웃으며 ‘○○○님, 서로 아끼고 살아 갑시다’라며 일필휘지해 주었다. 사인 요청 때문에 시내 식당이나 번화가는 곱게 걸어 갈 엄두를 못 낸다.

입원 때는 더했다. 척추마취를 하고 받은 수술 후 회복실에서 마취가 풀리길 기다리는데, 의사 2명과 간호사 3명이 잇달아 사인을 요청하는 데에는 별 도리 없었다. ‘태백산맥’ 이후 사인하는 데야 이력 나 있었지만, 그렇듯 비몽사몽간에 팬에게 사인하게 되리라곤 꿈도 못 꿨다.


소설에 의한 현대사 굴절, 가슴아파

‘1994년 4월 한국전쟁참전총연맹 등 8개 단체에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피소-6월 대공분실 취조실로 연행-14시간 반 수사’. 한국의 현대사가 또 다시 굴절되는 순간이었다. ‘태백산맥’이 국가보안법위반과 명예훼손혐의가 있다는 우익 단체의 고소ㆍ고발 때문이었다.

이후 당국의 강제 구인 위협에 맞서, 박원순 변호사 등 민주세력 편지 공방이 계속됐다. 당국의 강제 구인 위협에 식구들은 하얗게 질렸지만, 작가는 A4 용지로 7매 분량의 반론서를 써 내려 갔다. 입대중인 아들이 구타 당해 목디스크가 걸리는 등, 가뜩이나 무더운 그 해 6월은 문자 그대로 최악이었다.

인권 변호사 박원순씨를 통해 검찰과 7차례 소환 공방 편지가 오간 끝에 꼬리를 감춘 사건이다. 그러나 독자는 현명했다. 이듬해 3월 서울대 신입생들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묻는 조사에서 그의 ‘태백산맥’을 등극시켰다. 유난히 더웠던 그해 식구들을 가슴 졸이게 했던 일은 두고 두고 씻기질 않는다.


손자 재롱에 세월 잊는 평범한 할아버지

부부는 늙어 서로를 닮더니, 마침내 하나가 되는가. 작가 부부인 조정래 내외도 그러하다. 부인 김초혜 시인은 지난해 4월 자궁의 물혹으로 대수술을 받았다. 부인의 퇴원 후, 부부는 손을 잡고 마을을 산보하는 일을 거르지 않고 있다.

이제 탈장 수술의 통증은 가셨지만, 앞으로 6개월 동안은 운동 금지령인 그의 건강 비결만은 아니다. 작품 핑계로 그 동안 잘 해 주지 못 해 미안한 마음만 쌓였던 부인이 머잖아 시집도 하나 낼 계획이어서, 그의 마음은 더욱 환해 온다.

요즘 그는 생후 17개월 된 손자의 재롱 받아 주는 재미에 세월을 잊고 산다. 아들 조도현(31ㆍ계원대 언론정보학 강사)의 아들 재면의 “찬란한 재롱”에 “내 몸 속의 종족 보존 본능에 경외심 느끼는” 평범한 할아버지가 된다.

새 작품 구상이 끝나는대로, 손자를 위해서 동화도 하나 써 볼 생각이다. 마치 문호 톨스토이가 만년에 이르러 동화에 관심을 기울였듯. “내가 이전에 썼던 그 어떤 것보다 잘 쓸 거예요”라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소문을 들은 아동문학사 7~8개사가 벌써 계약 요청을 하고 있다.

3월 19일 서울대, 23일 교보문고, 4월 24일 부산 영광도서 등에서 ‘한강 완간 기념’ 초청 강연회에 대해 해냄 출판사와 그의 홈페이지(www.jojungrae.com)상에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원고지 앞에선 아직도 두려움 반, 막막함 반"

조정래의 일상은 철두철미 산문적이다. 기분이 내킨다거나, 감흥이 떠 오른다고 일필휘지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장인 정신이다.

그는 적어도 30장의 원고는 작성해야 하루를 다 한 것으로 본다. 완성 후 평균해 보니, ‘아리랑’은 하루 51장, ‘한강’의 경우는 41장 쓴 것으로 그는 계산했다.

신문에 연재할 때, 담당 기자가 한 번도 전화한 적이 없는 작가이다. 한 문장이 안 돼 한 나절을 책상 앞에 붙어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작업을 완수하면, ‘나를 이겼다는 성취감’이 밀려 온다고 했다.

일상은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침 7시, 점심 12시 30분, 저녁 6시 30분의 식사 시간은 좀체 변하는 법이 없다. 채식, 소식 위주에 규칙적 산보는 또 다른 원칙이다. 가장 힘들 때는 작품을 막 시작할 때.

원고지 한 장 쓰고 나면, ‘내가 왜 또 이 일을 시작할까’하는 두려움 반, 막막함 반의 감정을 다독여야 한다. 애창곡 제 1호는 단연 ‘눈물 젖은 두만강’. 독립 운동 하러 간 남편을 찾으러 만주땅을 헤매는 부인의 눈물 겨운 사연은 30년을 불러도 새롭다. 배호의 노래도 좋지만, 최진희의 ‘사랑과 미로’도 맛이 잇다.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미화했다는 평이다.

최근 김근태 후보 후원회장에서 만난 소리꾼 장사익씨의 구성진 ‘찔레꽃’과 ‘상여소리’를 그는 잊지 못한다. ‘한강’ 10권을 모두 다 읽은 장씨가 “조 선생님을 꼭 뵙고 싶다”고 요청, 이뤄진 만남이었다. 그는 김근태씨의 후보 사퇴를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밝혔다.

올 상반기는 집필 작업에서 한발 물러 앉을 생각이다. 독일 뮌헨 문인협회가 한국 재독 작가들과 함께 개최하는 독일 작가 회의에 참석, ‘한국 분단’에 대해 발표하기로 돼 있다. 생활 틈틈이 가벼운 독서를 해 가며, 부인과 함께 체력 회복에 주력할 계획이다. 최대의 낙은 물론 재면이의 재롱이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기자 aje@hk.co.kr

입력시간 2002/03/2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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