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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대통령의 덕목

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예선전이 전반전에서 껄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 예선을 시작하지 않은 한나라당도 이회창 총재에 대한 매끄럽지 못한 도전이 일고 있다.

새 천년 새 세기의 대통령 선거가 당권과 대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3공에서 6공까지의 옛 모습을 탈피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봉사 하겠다는 이들 후보들이 경선 과정에서 그들의 제 모습이나 신념을 제대로 들어내지 못한 것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걸 정치문화 탓으로 돌릴 것인가.

정확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이며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백악관 주인으로 미국을 이끌었던 조지 부시(78) 전 미국 대통령의 일생을 통해 우리의 대통령이나 대통령 후보들이 어떤 정치인이 돼야 할 지에 대해 살펴 본다.

부시는 다른 대통령들처럼 자서전을 쓰지 않았다. 재임 시절 베를린 장벽붕괴, 소련의 몰락, 천안문 사태 등을 접한 그는 그의 안보 보좌관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와 함께 ‘변모하는 세계’(1998년 刊)라는 회고록을 냈다.

또한 부인 바바라 부시는 94년에 532쪽짜리 ‘바바라 부시의 회고록’을 냈다. 그 책에는 부시 내외의 42년간에 걸친 결혼생활, 일생이 담겨 있다.

부시는 1999년 6월 아들인 텍사스 주지사 조지가 대통령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히자 일기, 편지 등을 모은 640쪽 짜리 책을 냈다.

18세 때인 1942년 6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에 항공병으로 자원 입대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쓴 편지부터 이후 57년의 일생을 살아가며 작성한 편지와 일기메모 등을 정리 한 책이었다.

책 제목은 편지의 마지막 문구인 ‘ALL THE BEST’(당신에게 축복을-편지와 기타 문건 속의 나의 인생)이다. 확연하게 어떤 감상이나 주장을 펴지 않은 채 18세에서 78세에 이르는 자신의 인생을 담담히 전달하고 있다.

그 편지들 속에는 1963년 텍사스 휴스턴의 공화당 지구당 위원장이 되어 64년 텍사스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66년 휴스턴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이후의 정치행로가 곳곳에 적혀 있다. 그건 전직 대통령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 대통령의 아버지로서 미국 국민에게 보여 주는 공직자의 숨김없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의 수만의 편지 중 정치에 첫 관심을 보인 편지는 1949년 11월 11일 친구 게리 버미스(버지니아주 의회 의원)에 보낸 서신이었다. 그때 기름 투성이의 작업복 차림으로 해저 석유 개발업자였던 그는 ‘나라를 위해 봉사 하고 싶다’며 정치에 관심을 표명했다.

정치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그는 1951년 11월 18일 제한속도가 시속 30마일인 지역을 50마일로 달렸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적발되자 법원에 이의를 제기했다.

“위반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드문 거리였다. 게다가 50마일은 아니다. 그 이하다. 이 점을 재판부는 인정해 줄 수 없는가. 이제부터 법을 지켜야 함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한다.” 상소는 기각되고 벌금 10달러가 부과됐다. 그는 그때부터 모든 공직에서의 기록을 깨끗이 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편지를 썼다.

정치는 왜 하는가. 그는 예일대 경제학과를 2차 대전 직후에 졸업했다. 1958년 7월 자신이 다니던 회사가 있던 미드랜드에 봅 코너리라는 고등학교 2년생이 전 과목이 A학점인데도 예일대 진학을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코너리는 아버지가 의사이지만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결손 청소년이 되었다. 코너리가 예일대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장학금이 꼭 필요했다. 부시는 이런 사연을 도널드 워커 교수에 편지로 알렸다.

“나의 주일 학교 학생인 이 아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게”라며. 코너리는 장학금을 받고 예일대에 갈수 있었다.

부시는 정치란 나라를 위하는 일이며 정치인은 억울한 사람을 돕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부시는 봉사정신과 애국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치인은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원의원이 된 2년 후인 68년 7월 리처드 닉슨의 ‘조용한 혁명’을 지지하는 소신을 밝혔다.

그는 한 비평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 우리는 나라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정부는 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해석했다.

부시는 하원의원 당시 닉슨에게 특이한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상원의원 도전과 관련해 면담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이 가까웠던 만큼 구두로 해도 될 면담요청을 굳이 편지로 요청한 것은 기록을 남겨 매사를 깨끗하게 처리하려는 그의 소신 때문이었다.

69년 5월 8일 부시는 닉슨에게 상원 출마를 위한 면담을 7월초에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 소수당인 공화당이 하원 1석을 잃으면 닉슨에게 불리할 수도 있었기에 닉슨과 면담하려고 한 것이다. 닉슨은 출마하라고 권유했고 부시는 낙선했다.

닉슨의 지지자였고 닉슨 탄핵을 반대했던 공화당 전국위원장이었던 그는 1974년 8월 7일 닉슨에게 “자진 사퇴만이 역사에 당신의 이름을 남긴다”고 썼다. 닉슨은 이 길을 택했다.

그가 편지에서 즐겨 쓴 말은 가족과 신념, 우정이었다. “가정을 튼튼히 하자. 어린이들에 투자하자. 모두 장애인을 돕자”고 부르짖었다. 대선 후보들이 음모나 정계개편 같은 말보다 더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3/2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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