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 105일…성과와 과제] 기자들 속 태운 '지퍼들'

철저한 보안의식으로 무장한 50인의 외인부대 '대과없는 마무리' 평가

“좀 봐주이소.” “우리도 좀 봐주이소.”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간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나서는 이상수(46·사시 20회) 특검보와 기자들 사이에서 어김없이 벌어졌던 실랑이 내용이다.

전자는 민감한 수사내용을 알려줄 수 없으니 좀 봐달라는 이 특검보의 부탁이고 후자는 그래도 기사를 써야 하니 조금만 알려달라는 기자들의 애원이다. 그는 곤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를 연발, 나중에는 ‘봐 주이소’ 특검보로 통할 정도였다.


원칙 지킨 수사진, 취재경쟁 치열

7명의 변호사와 3명의 파견검사, 1명의 회계사, 1명의 법무사, 2명의 변호사 사무장 출신 특별수사관 및 검·경 수사관 등 모두 50명 안쪽의 ‘외인부대’로 구성돼 105일간의 험난한 여정을 함께 해 온 특검팀은 그 동안의 성과만큼이나 많은 얘깃거리를 생산해냈다.

이들 중 기자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사람은 역시 사실상 대변인 역할을 담당한 이 특검보다.

그 특유의 멘트와 함께 이 특검보를 특징짓던 또 하나의 요소가 소위 ‘뒷걸음질 브리핑’으로 일컬어지는 독특한 브리핑 스타일이다. 이는 그가 매번 특검 사무실문을 열어놓은 채 짧은 브리핑을 마친 뒤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시작, 문으로 쏙 들어가버린 것을 빗대 기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또 브리핑 당시 그의 이동거리가 사무실 문으로부터 1m를 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1m 브리핑’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이마저 특검팀 수사상황 유출 논란이 빚어지면서 중단, 한때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결국 그의 ‘투철한’ 보안의식 때문에 특검팀이 대과 없이 수사를 마무리한 것 아니냐는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냈다.

차정일(60·사시 8회) 특검과 관련해서는 그의 자택 앞에서 벌어졌던 에피소드가 자주 언급되곤 한다. 그가 휴대전화는 물론 자택 전화에도 자동 응답기를 설치, 기자들과의 개별 접촉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할 정도의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바람에 잠복취재만이 유일한 단독 대면의 기회였다.

절치부심 기회만 노리던 모 기자는 실제로 택시를 대절한 뒤 그의 퇴근차량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추격전 끝에 모처에서 그를 따라잡는데 성공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 기자도 “내가 원칙주의자인 것 알지”라는 한 마디에 발길을 돌렸을 정도다. 어떤 기자는 자택 앞에서 여러 시간 차 특검을 기다린 끝에 겨우 차에서 내리는 그를 발견, 돌진했으나 이 때 주변에 숨어있던 다른 기자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검찰간부 의혹부분을 담당한 김원중(45·사시 25회) 특검보는 오며 가며 한 마디씩 내던지는 말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경우가 간혹 있어 한때 요주의 대상으로 떠올랐었다.

그러나 그도 민감한 부분에는 입을 다물어 “‘영양가’가 떨어진다”는 다분히 감정적인 혹평을 받았다.

그는 또 통화하기가 가장 힘든 특검팀 관계자로 ‘찍혔으며’ 어쩌다 ‘실수로’ 휴대전화를 드는 경우에도 “이 특검보님이 계시지 않습니까”라는 말만으로 전화를 끊어버려 기자들을 격앙케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마추어 화가답게 늘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은 덕택에 전체적인 점수는 후한 편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자들의 시선이 나머지 수사관들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무래도 각처에서 모인 수사관들이라 보안의식이 다소 떨어지는 만큼 ‘틈새시장’을 노리자는 전략이다.

실제로 이들 중에는 오며 가며 한 마디씩 요긴한 정보거리를 던지는 사람이 적지 않아 이들을 선점하려는 기자들의 경쟁은 치열할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얘기가 되는’ 수사관들은 밤마다 각 언론사 기자들에 의해 술집으로 끌려가곤 했다. 특히 모 수사관은 모 언론사 여기자와 단독으로 만나 취재 겸 데이트를 즐기다가 다른 기자들에게 적발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참고인이 조사내용 '브리핑' 하는 촌극도

참고인 가운데도 화제의 인물들이 많이 탄생했다. 어떤 이는 이번 특검 기간 최고의 스타로 전 서울시정신문 회장 도승희씨를 지목했다.

그는 조사를 받고 나올 때마다 조사내용을 기자들에게 상세히 알려준 데 이어 개별적으로 은밀히 찾아간 기자들에게도 말을 아끼지 않아 ‘도 특검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최근에는 “입을 다물라”는 엄명에도 아랑곳없이 아예 기자들을 상대로 ‘약식 브리핑’을 갖다가 퇴근길에 나선 두 특검보에게 현장을 적발당하는 웃지 못할 사건도 발생했다.

수사기밀이 줄줄 새나가는 장면을 목격하고 잠시 당황했던 김 특검보는 이내 두 손 들었다는 듯이 기자들에게 “도승희씨에게 물어보시죠. 더 자세히 알려줄 겁니다”라는 말을 던져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전 아태재단 사무부총장 황모씨도 빼놓을 수 없다.

이수동 전 아태재단 이사의 부탁으로 김영재 전 금감원 부원장보에게 전화를 걸어 이씨와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이유로 특검팀 조사를 받은 그는 조사기간 내내 “글쎄요, 아무래도 기억이 없는데 관련자 주장을 듣고 보니 정황상 그럴 수도 있었겠습니다”라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견지하다가 막상 이 전 이사의 구속영장에 이어 일부 언론에 실명이 거론되자 갑자기 민주투사로 돌변해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가 찍어낸 ‘내 이름 석자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는 제목의 4회 연속 문건은 비장한 어투로 가득 차 한 때 특검팀 안팎의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문제의 전남 진도군 보물발굴 사업자 일행도 화제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끝까지 보물이 실재함을 주장해 주위를 안쓰럽게 했다.

특히 이 중 한명은 “이번 사업에 이어 앞으로 200조원 대의 큰 사업을 구상 중이니 투자를 하시라”고 기염을 토해 기자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또 수사과정에서 대통령 처조카인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가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된 직접적 계기가 한 역술인의 조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주위를 허탈하게 만들기도 했다.

박진석 사회부 기자

입력시간 2002/03/28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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