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산양지킴이 환경운동가 박그림

"설악은 어머니의 산, 산양과 난 전생에 피붙이"

꿈을 꾼다. 늘 달아나기만 하던 산양이 웬일인지 제 발로 걸어와 그에게 안긴다. 너무도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홀린 사람처럼 넋을 잃은 채 바라보다 그만 꿈을 깬다.

" 그런 꿈을 자주 꿉니다. 1년에 서너번 쯤은 실제로 마주 칠 때도 있지만, 보자마자 순식간에 달아나버립니다. 이해하실지 몰라도, 늘 산양에 대한 그리움 같은게 있습니다. "

설악산 산양지킴이 박그림(54)씨. 그와 연락불통이 되는 날은 어김없이 설악산 속에 들어가 있는 날이다. 한번 들어가면 며칠씩 함흥차사다.

멸종위기의 산양을 그림자처럼 뒤좇는 중이다. 산양 똥을 먹어보기도 하고, 영역 표시 삼아 뿔로 나무에 긁어댄 흔적까지 탐정처럼 확인한다. 산 아래에선 환경운동에 몸바친 투사지만 산 속에선 학자에 가깝다.

이 일이 벌써 10년째. 잠도 산 속에서 잔다. 달랑 침낭 하나만 뒤집어쓴 채 낙엽 더미에 눕는다. 겨울에도 산중 노숙자처럼 산다. 산양이 싫어할까 봐 밥도 마음 놓고 못 먹는다.

배낭 짐도 줄일 겸 음식냄새를 풍길 일 없는 분말형 생식 한줌을 털어 삼키면 식사의 전부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내려오면 체중이 4-5kg씩 빠져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본다. 산양을 따라다니는 사이 그도 점점 야생 사나이가 되어버렸다.


토박이 서울시민이 10년만에 야생사나이로

1992년 설악산에 이삿짐을 풀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시골과는 거리가 먼, 토박이 서울 시민이었다. 지금도 부모님과 다른 동생들은 서울에 살고 있다.

고교에 다니던 60년대 말부터 설악산에 드나들기 시작해 40여년 이 곳과 인연을 맺어왔다. 72년 한국산악회에 가입하면서 더욱 발길이 잦았다. 마음이 자란 것도, 삶이 살 찐 것도 설악산 품안에서였다.

조그만 의류사업을 벌이면서 제법 수입도 괜찮았다. 그러나 갈수록 병 들어가는 설악산 현장은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고민 끝에 '설악산 곁에 살러 가자'고 가족에게 말했을 때 아내는 두말없이 뜻을 받아주었다. 그녀 역시 아이들을 건강한 땅에서 키우고 싶어했다.

"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설악산은 제게 어머니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병들어 누웠다면 자식으로서 어떻게 했을 까 생각하니 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제가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됩니다. "

짐을 싸 들고 내려갔지만 당시 지역엔 환경단체 하나 마련돼 있지 않았다. 이듬해 직접 '설악녹색연합'을 만들고 활동에 나섰다.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설악산 방문객 수만 1년에 40만 명, 상황은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곳곳에 파괴된 현장과 마주 칠 땐 너무나 속이 터져 숲속에서 혼자 울기도 했다.

참고할 자료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금강산의 명성에 치여 설악산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드물었던 탓이다. 닥치는 대로 자료를 끌어 모았다.

헌 책방을 뒤지는 건 물론, 누구에게 어떤 자료가 있다는 소문만 들리면 곧바로 달려가 사정하며 얻어왔다. 고서 경매에서 비싼 값을 물어가며 사들인 책도 여러 점, '설악산'이란 단 한 줄만 나와도 무조건 붙잡았다. 2년 후부터 시작한 산양연구 역시 비슷한 고행기를 반복했다. 현재 그의 방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책들이 그렇게 모였다.

매일매일 싸움으로 초창기를 보냈다. 문제의 현장마다 철저히 감시, 고발하다 보니 관련 공무원들은 물론 주민들과도 처음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비난에다 때로는 자신이 세 들어 사는 집 주인에게까지 '왜 저런 사람에게 방을 내줬냐'고 빈정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 그러다가 언젠가 이곳 나무를 마구 벌채한 일로 방송에도 보도된 적이 있는데, 그 일로 명목상 책임을 맡고 있던 직원이 곧바로 좌천을 당하면서 그 충격으로 반신불수가 됐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뼈아프게 생각한 것이, 하긴 해야 할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서로가 다치지 않고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더 충분한 대화와 협의를 통해서 문제를 풀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젠 관리사무소와의 관계도 좋습니다. "


산양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산양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한 건 1994년부터였다. 지금도 멧돼지, 노루, 고라니, 산토끼, 너구리, 산양, 오소리, 살쾡이 등 야생동물이 살아가는 천혜의 명산, 설악산.

그 중 멧돼지 다음으로 큰 젖먹이 동물이 산양이었다. 95년 유네스코로부터 설악산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 받는 문제로 박씨는 캐나다인 조사관의 가이드를 맡게 됐다. 그런데 한참 현장을 둘러보던 조사관이 대뜸 그에게 '보고서에 나와있던 야생동물이 왜 실제로는 하나도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일침을 당한 뒤, 박씨의 시선은 야생동물에 붙박히기 시작했다.

우선 '깃대 종 보호운동'이란 이름을 걸고 가장 보호가 시급한 야생종부터 하나하나 고비를 풀어가기로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산양이었다. 산양은 설악산이 자리한 강원도 일대에서부터 경북 울진 주변까지 이르는, 얼마 남지않은 백두대간의 식구였다.

" 산양똥을 먹기 시작한 건 그렇게라도 산양을 제 안에 넣고 싶어서 였습니다. 또 그들이 뭘 먹고 사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구요. 맛이요? 싼지 얼마 안 된 똥은 노랗고 미끌미끌한 것이, 쓴 맛이 납니다. 그렇다고 다른 분들은 함부로 산양똥을 먹으면 안됩니다. 기생충이 많거든요. 저도 그걸 먹은 뒤엔 꼭 기생충 약을 먹습니다. "

이 애닯은 숨바꼭질에 따라다니는 그의 필수군장은 10m짜리 보조자일과 GPS, 카메라, 비디오, 쌍안경, 보온용 옷 한벌, 지도와 기록 도구들 등. 특히 지난해부터는 GPS의 도움으로 보다 정확한 산양의 궤적을 기록해나가고 있다. 그간 찍은 사진만도 약 8천 점, 근래엔 비디오까지 이용해 자료가 더 다양해졌다.

그가 추정하는 현재 설악산내 생존 산양수는 100마리 이내. 보금자리가 위협 받으면서 번식여건이 점점 악화돼 뭣보다 걱정스럽다.

산양은 2년의 성숙기를 거친 뒤 1년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대부분의 풀 종류를 먹고 살며, 겨울엔 잔나뭇가지 등으로 연명한다. 수명은 10년 안팎. 지금껏 용케 살아남은 비결 중 하나는 어떤 거친 바위도 날렵하게 타고 다닐 만큼 잘 발달된 발을 가진 덕분이다.

한국산 산양은 러시아산과 거의 똑같고, 일본산과는 오히려 차이를 보인다. 산양이 인간을 피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탓이다. DMZ내 산양들이 보여주듯 원래는 사람과도 친한 온순한 동물이지만, 사람들의 직,간접적인 해꼬지가 있은 뒤부터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박씨의 그리움이 더욱 사무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어떨땐 제가 있던 곳 뒤에 산양이 이리저리 서성대다가 간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산양은 늘 자기가 살던 구역안에서만 사는 동물인데, 워낙 같은 길을 자주 다니다 보니 우연히 산양도 저를 발견하고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간 거지요.

그럴 땐 기분이 참 묘합니다. 어쩌면 산양들도 이미 나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내 앞에 있긴 있다는 생각을 할 때면 특히 그렇습니다. "

환경운동 프로그램을 통해 지급받는 활동비외엔 그리 큰 소득이랄 것도 없는 살림.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빠듯한 가장의 빈 틈을 가족들은 묵묵히 견뎌주었다. 설악산으로 이사 올 무렵 초등 학생이었던 남매가 어느새 장남이 군에 입대할 만큼 훌쩍 장성할 때까지, 무엇보다 아내의 이해와 희생이 절대적이었다.

올해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주도로 '산양 모니터링'이 진행될 만큼 예전보다 한결 상황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건성이다.

국내의 모 대기업이 7억원이나 들여 펴냈다는 국내 최초의 조류도감은 알고 보면 얼굴이 화끈거려 자랑할 수도 없다. 표지부터 내용까지 빼다 박은 일본 도감의 복사판이다. 작년에 발행된 '국립공원 포유동물 안내서' 역시 사람들의 무신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야생산양이란 이름 아래 실린 그림은 우리 것이 아닌 일본 산양. 해당처에선 예전부터 박씨가 건네준 다수의 자료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성으로 흘려보기만 한 결과다.


야생동물 먹어주기는 야생동물 망가뜨리기

" 그외에도 엉터리 같은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지자체 마다 겨울이면 앞 다투어 벌이는 '야생동물 먹이주기 행사'란 것도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정말 굶주린 동물들을 살리고 싶다면 먼저 그 주위에 어떤 동물들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 주로 뭘 먹는지, 양은 얼마나 주어야 하는 지부터 조사한 뒤 먹이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맞춰서 줘도 쉽게 먹지 않는 게 야생 동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무 준비도 없이 그저 단골메뉴로 감자 같은 것만 대충 던져놓고 가면 그걸로 끝입니다. 얼마나 먹고 갔는지 나중에 한번 확인해보는 일도 없습니다. 지나다 보면 겨울 내내 그 감자들이 그대로 다 썩어나갑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 비용으로 결식 아동들 밥이라도 한번 더 사주는게 훨씬 좋은 일을 하는 겁니다.

또, 그렇게 제 먹이도 못 구해 굶어 죽을 만큼 나약한 동물이라면 그대로 도태되도록 놔두는 게 오히려 자연의 순리를 지켜주는 겁니다. 환경 보호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간섭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냥 저들끼리 알아서 살도록 우리가 망가뜨리지도, 참견하지도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됩니다. "

지난해 전국 37개 도시를 잇는 자전거 환경강연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박씨. 20년 넘게 산양을 연구해 온 러시아인 박사 부부와의 만남도 같은 해에 얻은 행운이다. 설악산과 러시아를 오가며 산양에 대한 서로의 열정과 지식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었다.

산의 해로 지정된 올해는 오히려 그를 심란하게 한다. 아직도 자연보호위원회 예산이 1년에 45만원에 불과한 나라, 행락객은 넘치지만 지킴이는 희귀한 나라. 늘 그랬듯이 기념식이나 심포지엄 한 두번의 '의무방어'로 끝날지 모를 산의 해가 미리 걱정스럽다.

" 얼마 전 북한산에 오르면서 사람들이 '터미네이터' 같다고 느꼈습니다. 봄이 오면서 산길 곳곳에 예쁜 꽃망울이 여기저기 터지고 있는데도, 그런 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다들 빨리 정상에 오르는데만 급하더라구요. 체력 단련 때문이라면 그건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는데, 왜 저러고 산을 타는 걸까, 마음이 쓸쓸했습니다. "

마치 환약환처럼 생긴 산양똥 몇 덩어리를 소중한 선물처럼 건네주는 박씨. 행여나하여 '산양을 끌어안고 찍은 사진이라도 혹시 없냐'고 묻자 '할 수만 있으면 나도 그런 사진을 한번 찍어보는 게 소원'이라며 웃었다. 그 많던 산양은 다 어디 갔을까. 박씨는 오늘도 산양꿈을 꾼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3/3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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