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세상] 귀가 아닌 마음을 사로잡아라

아침 10시, KBS 라디오정보센터 회의실.

"어제 어떻게 됐니?"

"응, 민형이가 자기가 준상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거야. 근데 유진이는 아직 그걸 모르고...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후배 프로듀서들의 얘기가 팀장의 알토란같은 회의시간을 시작부터 잡아 먹어가는데, 역시 아니나 다를까?

"아이구 우리 프로그램은 안중에도 없나? ‘안녕하십니까 정관용입니다’에서 뭘 할 것인가를 생각도 않고, 4월의 국민제안은 어떻게 할건가, 다들 한마디씩 해봐?" 예의 애교(?)를 띤 말투지만 안경 너머로 가시가 번뜩이는 팀장 말 한마디에 아침 아이템회의가 제자리를 잡고 가동된다.

장안에 첫사랑 신드롬을 일으켰던 KBS 2TV의 인기 드라마 '겨울연가'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이다.

필자는 모든 시청자들이 주시했던 첫사랑의 주인공인 유진(최지우 분)과 준상(배용준 분)보다는 첫사랑의 남자를 항상 마음에 품던 유진 옆에서 그녀를 바라봐야 했던 박용하군이 열연한 상혁이라는 인물에 애정이 간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상혁이 라디오 프로듀서이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유진을 다시 준상에게 떠나보낸 지금, 상혁이 제작하는 음악프로그램에서는 어떤 음악들이 흘러나올까?

필자라면 파격적으로 나훈아씨의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라는 노래를 선곡하고 싶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노래인데... 이별이라는 설정에는 가사 말이 가슴에 파고드는 트로트 노래가 좋을 듯하다. 독자 여러분이라면 어떠한 노래를 골라보고 싶은 지도 묻고 싶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겨울연가의 구성에 허점(?)이 보인다.

어떻게 음악과 노래를 다루는 라디오 프로듀서가 사랑에 실패한단 말인가? 드라마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고등학교 방송반에서 활동했다던데... 학창시절에 방송반 활동을 할 정도라면, 음악에 관심들이 많을텐데... 특히 극중 유진이는 순진하면서도 감성적인 성격을 보이던데...

이러한 구도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라는 작자가 그런 여성의 마음을 휘어잡을 능력도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필자가 능력(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작업에)이 출중한 프로듀서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랑과 방송 프로그램과의 관계를 얘기하기 위해서다. 먼저 사랑을 볼까? 남자나 여자나 사랑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든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좋게 얘기해서 사로잡는 거지, 남자의 입장에서는 여자의 마음을 빼앗아야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한편 방송 프로그램의 성공이라면 무엇인가? 방송 프로그램은 공익적인 면도 담보해야겠지만, 우선 많은 청취자들이 프로그램을 들어야 할 것이다.

많은 청취자들의 귀를 모으려면, 그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고, 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속적으로 관심을 묶어놓아서, 습관적으로 프로그램을 듣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조그만 라디오 스튜디오 바깥에 있는 각양각색의 청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리를 해보자. 사랑이 남녀간의 팽팽한 긴장이라면, 방송은 전파를 사이에 두고 프로듀서와 청취자들이 벌이는 줄다리기이다. 이 때문에 프로듀서는 청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그들을 하루종일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을 하는 사람이다.

하루에도 수십만·수백만 명의 청취자들과 마음 빼앗기 게임을 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듀서가 사랑에 실패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정서와 감정의 결정체인 음악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는 라디오 프로듀서들이 말이다.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

필자도 왕년에 연정을 품었던 한 여성에게 클래식 소품들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선물하고 마음을 산 적이 있다.

선곡한 음악이 좋았다기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였다.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을 하다 보면 노래 한 곡을 다 넣기에는 시간이 모자라서 빈 테이프를 돌려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노래가 중간에 끊어지는 경우가 흔히 있게 된다.

필자는 카세트 테이프 앞면과 뒷면의 런닝타임을 맞춰서 음악을 선곡했고, 녹음이 되지 않고 남은 카세트 테이프 부분은 테이프 케이스를 열고 잘라낸 것이다. 그래서 앞면을 모두 듣고 나면, 정확하게 뒷면이 시작되게 한 것이다.

이쯤해서 아직 계획도 없는 겨울연가Ⅱ의 첫 장면을 유쾌하게 상상해 본다.

유진이 장님이 된 준상과 재회한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날 라디오에서 이런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세월의 흔적이 남은 유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질 않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가수 이상은의 '언젠가는'이 듣고 싶어진다.

이경우 KBS라디오 1국 PD

입력시간 2002/04/0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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