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데이트] 도지원 "뭬야, 내가 떴다고?"

'여인천하' 경빈 박씨에서 '엄마의 노래' 미혼모로 변신

“뭬야.” 앙칼지게 내지르는 외마디 고함소리와 독기어린 표정이 안방 시청자의 눈과 귀를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SBS 사극 ‘여인천하’의 경빈 박씨 역으로 인기를 모은 탤런트 도지원(34).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으로 드라마 성공의 견인차 역할을 해낸 그가 4월 8일 죽음으로 극에서 사라졌다.

“사실은 빨리 죽기만을 빌었어요. 경빈으로 살아온 1년 동안 온 몸의 기를 다 소진한 느낌이었거든요. 하지만 막상 떠나려니 시원 섭섭하네요. 스텝이나 동료 연기자들과 헤어진다는 게 제가 극에서 사라진다는 사실보다 더 아쉬워요.”

‘여인천하’를 떠나는 도지원은 의외로 담담했다. 데뷔 이후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해준 드라마였건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다만 “동료들의 격려와 응원이 없었다면 경빈의 인기도 없었을 것”이라며 호흡이 척척 맞았던 ‘여인천하’팀에 감사를 전했다.


"예쁜 척, 고상한 척 안했어요"

경빈의 인기는 예상외의 결과다. 당초 문정왕후(전인화 분)와 정난정(강수연 분)에 가려 경빈은 눈에 띄지 않는 배역이었다.

도지원 자신도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장자인 복성군을 낳은 후궁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었다. “뭬야”의 히트 또한 그랬다. 드라마 초반엔 문정왕후 역시 “뭬야”란 말을 썼다. 지만 경빈은 ‘떴다’.

남들과 똑같은 했던 “뭬야”라는 대사 한 그가 내뱉을 땐 독특하게 들렸다.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랬다.“예쁜 척 하지 않고 배역에 빠져 들었어요. 어차피 악역으로 그려지는데 우아한 척 고상한 척 할 필요가 있나 싶었죠. 감정에 충실하려다 보니 대사의 억양도 절로 강해진 것 같아요. “뭬야”가 처음 유행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그게 제가 히트 킨 것인 줄도 몰랐어요.”

그의 말 속에서 ‘프로’다운 근성이 느껴진다. 그는 이 작품을 끝내고 얼굴이 무척 수척해졌다. 갸름한 얼굴 선, 오똑한 콧날, 맑은 기운이 넘치는 눈매 등이 예전 그대로이지만, 인상은 한결 강해졌다.

카리스마가 묻어날 듯 하다. 독한 여인으로 그려지는 배역의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데는 도움이 됐다.

하지만 더 이상 살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초콜릿을 쌓아 놓고 먹은 것은 물론 평소 ‘저런 걸 어떻게 먹나’하고 그토록 싫어했던 돼지 삼겹살을 이젠 입에 착착 달라붙을 정도로 줄 창 먹었다고 한다. 그 자신을 온통 쏟아 부었던 혼신의 연기를 하기 위해서 체력 소모가 엄청 컸던 탓이다.

드라마가 끝나면 무작정 쉴 계획이었다. 건강도 추스릴 겸 여행이라도 가서 모처럼 여유롭게 재충전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연기력을 인정 받는 스타급 배우를 방송국에서 그리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

‘여인천하’의 촬영이 채 종결되기도 전에 도지원은 다시 새 드라마로 안방극장에 얼굴을 비쳤다. 4월 1일 첫 방송을 탄 SBS 아침드라마 ‘엄마의 노래’의 미혼모 역이다. 대학생 때 사랑한 남자의 아이를 홀로 낳아 키우는 38세의 삽화 작가 현명혜를 연기한다. 겉으로는 밝은 척 하지만, 한없이 여리고 눈물이 많은 캐릭터다.


중종역 최종환과 다시 콤비

처음 이 역을 제의 받고 그는 많이 고심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그에게 ‘미혼모’라니. 게다가 그 딸이 18세나 된 말만한 처녀라는 것에 기겁할 뻔 했다.

여기에서 그쳐도 좋으련만, 딸이 결혼도 빨리 하는 바람에 젊은 할머니가 되는 역까지 소화해야 한다. 솔직히 꺼려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예전에 드라마 ‘Queen’을 썼던 그가 좋아하는 작가가 쓰는 드라마라는 데 얼었던 마음이 움직였다. 비록 소재는 어둡지만 극 분위기를 밝게 끌어갈 것이라 하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경쾌하고 활달한 성격의 당찬 미혼모예요. 내면에 아픔을 간직했으면서도 이를 속으로 삭이는 꿋꿋한 여인이죠. 섬세한 연기력이 필요한 배역입니다.” 경빈으로 연기의 맛을 깨우친 그는 내친 김에 이번에는 ‘내면 연기’로 승부를 보겠다는 작정이다.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 이 드라마에서는 경빈에게 사약을 내린 중종 역의 최종환이 그를 짝사랑하는 남자로 나와 전생(?)에서 못다한 사랑을 펼친다고 한다.

국립 발레단 출신의 도지원은 1990년 ‘서울뚝배기’의 강혜경 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됐다”는 말이 그에게 꼭 맞아 떨어지는 표현. 그는 당시 연기 경력이 전무했음에도 일일연속극의 주연으로 발탁, 상큼하고 청순한 이미지로 단숨에 스타대열에 합류했다.

그 해 연말에는 신인 연기상을 거머쥐며 부러울 것 없는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연기자의 길은 갈수록 녹록하지 않았다.

이후 멜로드라마, 시대극, 시트콤, 미니시리즈 등 다양한 장르에서 묵묵히 연기력을 쌓아갔지만 팬들의 환호는 예전 같지 않았다. 94년 MBC ‘까레이스키’ 출연 때는 그 좌절감으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좋은 작품이고, 고생도 많이 했는데 시청자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던 것이다. 이때 그가 자신을 다잡을 수 있던 힘은 발레리나 시절부터 몸에 익혀온 남다른 근면함과 책임감이었다.


약속에 철저한 '아름다운 연기자'

그는 시간 약속에 유달리 철저한 연기자다. 신인 시절부터 톱스타의 반열에 이름을 올려놓은 지금까지 그는 언제나 촬영장에 일찌감치 나와 다른 동료들을 기다린다. 겹치기 출연도 절대 하지 않는다.

한 작품에 전력을 기울이고픈 배우로서의 욕심 때문이다. 대사 하나를 발음하는 데도 소홀함이 없다. 그는 대본을 받으면 맨 먼저 국어대사전을 펼쳐 놓고 발음의 장단을 일일이 짚어볼 정도로 완벽한 연습을 한다.

도지원은 20년 후, 아니 꼬부랑 할머니가 되는 먼 훗날에도 ‘늘 한결 같은 연기자’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그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배역에 따라서는 요조숙녀도 되고 악녀도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연기자로서는 ‘신인’의 겸손함을 끝까지 잃지 않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배현정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4/05 18:05


배현정 주간한국부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