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중원의 땅 충주

충주(忠州). 여지승람(輿地勝覽)은 원래 마한(馬韓)의 땅이었는데 고구려와 백제가 그 땅을 나누어 차지하였다가 훗날 모두 신라 땅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충주는 중원(中原)이라 하여 고구려의 국원성, 미을성, 완장성, 탁장성으로 내려오던 땅이었다.

이 지역은 옛날 3국(고구려, 신라, 백제)이 서로 국경을 맞대고 으르렁 대던 곳이어서 고구려, 신라, 백제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이를 테면 고구려비, 신라비(적성비)가 그 흔적일 뿐더러, 충주의 옛 땅이름인 예성(禮城)도 백제지명이다.

서기 475년 신라 자비왕(慈悲王 18)때 신라의 영토가 되면서, 경덕왕(景德王) 때 중원경(中原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후 고려 태조때 ‘국토의 중심 고을(中心)’이라는 뜻으로 충주라 부르게 된 것이 오늘의 땅이름 이다. 그래서 충주를 에워싸고 있는 중원(中原)도 우리나라 중심에 자리한다는 뜻으로 ‘가운데 벌’이란 큰 이름을 오늘에 이르도록 누려온 것이다.

남한강가 중원 가금(可金)면 탑평리(塔坪里)에는 국보 제6호인 칠층석탑이 우뚝 서있다. 이 탑은 현존하는 신라 시대 탑들 중 높이가 자그마치 14.5m로 제일 높은 탑이다. 황룡사의 9층탑과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이어 국내의 탑들 중 3번째로 높은 탑이다.

신라가 중원벌을 점령, 옛 고구려의 세력을 진압하고 또 국토의 중심임을 상징코자 이 곳에 세운 기념비적 탑이라 한다. 탑의 자리가 한국 대륙의 남북 3,000리 동서 900리의 경위도(經緯度)가 교차하는 곳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이 탑이 서 있는 자리가 한반도의 중심부에 있다 하여 이곳 사람들은 한결같이 ‘중앙탑’이라고 부른다.

멀리 삼국 시대부터 6ㆍ25 전쟁에 이르기까지 ‘중원벌을 지배하는 자가 한반도를 지배한다’는 설을 이곳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 문화가 집합하다 보니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만 해도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고을이다. 중원의 용전들을 사이에 두고 신라성인 보연성(寶蓮城)이 고구려성인 장미성(薔薇城)이 대조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당시 한반도 중심부인 충주 땅을 서로가 넘보고 힘겨루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1979년 2월 25일 남한에서 유일하게 만주벌의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닮은 고구려비를 예성 향토 사학자들이 발견, 사학계에 큰 반응을 불러 일으킨 적도 있다. 이 고구려비는 지금 국보 제20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북한이 남침한지 한 달도 안돼 이 중원 땅을 차지하고 마치 ‘남조선 해방이라도 시킨 것’처럼 김일성이 직접 이 중원 수안보(水安堡)에서 승전 파티를 연 것도 중원이 국토의 중앙에 자리한 비중이 아니었을까!

국토의 중심 고을, 충주 중원벌 탑평리 들판에 중앙탑이 역사의 이끼를 머금은 채 오늘도 넘어가는 석양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있다. 충주의 상징물은 중심 고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름 220㎝, 길이 270㎝, 무게 1000kg이나 되는 중심고(中心鼓) 라는 큰 북이다.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 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2/04/0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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