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정치인의 언론관

4월 11일은 고(故) 백상(百想)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창간 발행인의 25주기다. ‘장 사주(張社主)’로도 불렸던 그의 신문에 관한 어록 중 “누구도 신문을 이용 할 수 없다. 누구도 신문을 이용 할 수 있다”는 명구가 새삼 생각난다.

중반을 넘은 민주당의 노무현, 이인제 두 대선 후보가 벌이고 있는 언론 논쟁을 보면 더욱 장 사주의 명구를 되새기게 된다. 이 두 후보가 신문을 이용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해답을 대통령 아들을 둔 조지 부시와 미국의 국기 세우기 열풍을 불러온 91세의 로널드 레이건의 언론관을 통해 구해 본다. 두 사람의 언론관은 대통령이 되려는 우리 후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소리 일지 모르지만.

1974년 당시 미국 공화당 전국 위원장이던 조시 부시는 7월 24일 7쪽에 달하는 긴 편지를 ‘아들들’(조지<현대통령>, 젭<플로리다 주지사>, 닐, 마빈)에게 썼다. 당시 워싱턴 정가는 의회가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탄핵하려 하는 등 극도의 혼란에 빠져있었고 부시는 2년간의 유엔 대사 업무를 마치고 공화당 전국위원장으로 워싱턴에 막 복귀한 상태였다.

아들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최고의 시대와 최악의 시대’에 살고 있는 미국 보수주의의 대표인 아버지의 ‘험난한 시대’의 역사의식을 떳떳이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쉽게 말해 사내 아이들이 공화당의 당수격인 아버지 때문에 “기(氣)가 죽지 말라, 아버지는 역사의식을 갖고 맞서고 있다”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편지였다. 그는 닉슨 대통령이 월남전 처리와 중국과의 수교 같은 큰일을 했다는 사실을 아들들이 유념해야 한다고 누누이 주장했다.

그러나 부시는 닉슨이 이런 업적에도 불구,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렸다고 전하고 있다. 한국 소녀 합창단이 크리스마스에 닉슨을 찾아와 성가를 부른 뒤 한 어린이가 대통령의 목을 감싸며 인사를 하는데도 닉슨은 뻣뻣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그는 무척 즐거워 했지만 표정은 딱딱했다.

특히 닉슨은 미국 명문 사학들인 아이비리그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 닉슨은 예일대 총장(킹맨, 브르위스터)이 대학을 좌파로 몰고 간다고 불만스러워 했다. 테니스를 치고 마티니를 마시는 동부 신사를 부시는 혐오했다. 그래서 동부의 신문사와 기자들을 혐오했다.

부시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썼다. “신문이라는 것은 뚜렷한 업적에 대해서는 힘을 다해 추적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악관이 신문을 적대하면 워싱턴 정계는 황폐화 된다.” 부시는 닉슨의 편견에 휩싸여 그를 보좌했던 여러 인물들(할더만, 콜슨, 에리히만딘)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전하면서 이들이 워싱턴 정치 문화를 저질화 시켰다고 아들들에게 설명했다.

부시는 닉슨에게 워싱턴이 정치적 평온을 되찾기 위해서는 “신문이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주변의 인사를 개혁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결국 부시는 이 편지를 쓴 10여일 후 전국위원장직을 사임했다.

그 다음날인 74년 8월 8일 닉슨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부시가 아들들에게 전한 편지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은 “신문과 적대 관계인 대통령은 평온의 정치문화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후보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부시의 언론과의 관계는 레이건 만큼 길지 않다. 레이건은 1975년 1월부터 79년 10월까지 전국 200여 방송국에 1,000여 회 칼럼을 쓰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다뤘다. 그러나 그는 언론 문제에 대해서는 4, 5회를 썼을 뿐이다. 주로 외교, 국방, 경제, 교육, 노동 문제 등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레이건의 76년 9월 26일자 ‘신문에 대해’라는 방송 원고는 그의 신문관을 잘 나타내 준다. 그때는 예선에서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 패하고 다시 마이크를 잡았을 때였다. 레이건이 76년 1월 뉴햄프셔 예선에 버스 2대를 몰고 나설 때, 동부의 신문들은 그를 ‘서부에서 온 반동적인 네안데르탈인(원시인)’이라 불렀다. 레이건 자신도 이 신문들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 느꼈다.

그러나 레이건은 오래 전부터 “어떤 어려운 문제도 대화로 풀 수 있다. 이 대화는 신문이나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기자들과 함께 버스로, 비행기로 8개월 여 동안 미국을 누비면서 그는 기자들이 충실한 보도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들(기자들)은 나의 영원한 친구”라고 느끼게 됐다.

“나는 그들이 나를 공정하게 취재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객관적이었습니다. 만약 본사에서 그들의 송고한 문장 하나, 문자 하나를 잘랐을 때 느끼는 그들의 절망감은 대단했습니다. 나는 이제는 그들의 친구가 됐고 그들과의 우의를 두텁게 해 곧 부자가 될 것입니다.”

레이건은 80년에는 지미 카터 대통령을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누가 이런 레이건이 신문을 이용했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부시처럼 많은 사람들은 닉슨이 신문을 악용해 역사적 업적을 스스로 뭉개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 신문을 누구도 악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신문을 누구나 선용할 수 있다.

/박용배(언론인)

입력시간 2002/04/0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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