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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 특사 김정일 위원장 면담 5시간

임동원 특사 김정일 위원장 면담 5시간

명분주고, 대화 트고… 열린 남북

4월4일 오후5시30분 평양시 대성구역 임흥동 백화원 초대소.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는 막 차관급 접촉을 마치고 돌아온 김보현 국정원 3차장의 보고를 듣고 불안한 마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 밤이 지나면 서울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북측이 주적론, 외세공조론만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공유는 커녕, 이산가족 행사 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판이었다.

3일 오후 만난 김용순 노동당 대남비서는 물론이고, 북측 ‘회담 일꾼’인 임동옥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남측의 한미일 공조는 대북 압살정책’이라며 거세게 몰아붙였다.

“한미일 공조는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국제사회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라고 수없이 설명했으나, 북측은 “전쟁과 평화 중 한가지를 택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특사에 대한 대접도 시원찮은 듯했다. 특사는 대통령의 뜻을 전하는 정상급 외교관인데, 여느 남북회담처럼 반복된 실무접촉 끝에 본회담을 하며 진을 빼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 중에서 “특사 파견을 받았으면 격조에 맞는 예우를 해야 하지 않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왔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위원장 동지께서 곧 특사를 만나러 오십니다”는 김용순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임 특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 위원장 면담이 성사됨으로써 특사의 임무가 시작됐고 합의도출의 가능성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도 2000년 9월 장관급회담 와중에 현장지도차 지방에 있던 김 위원장을 독대, 회담을 반전시켰다.


김위원장 “터놓고 얘기합시다”

정부 당국자들의 배경 설명을 재구성해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번에도 파격적으로 손님을 맞았다. 저녁에 느닷없이 숙소를 찾아와 담판을 짓는 김 위원장의 외교 스타일이 다시 입증됐다.

김 위원장은 1998년 10월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2000년 6월 김 대통령, 그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지난해 5월 요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 때도 백화원 초대소를 찾아 국빈을 맞았다.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에 안부를 전한 뒤 특유의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임 특사를 2년 만에 다시 만나니 반갑다”면서 “터 놓고 토론합시다”라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했다.

임 특사는 김 대통령의 친서를 김 위원장에게 전달한 뒤 “대통령의 생각을 설명하면서 다소 직설적 표현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며 미리 양해를 구했다. 2시간 대화, 3시간 만찬 등 무려 5시간에 걸친 면담의 대부분은 미국의 대북 강경책으로 촉발된 한반도 위기 상황에 대한 설명과 이를 해소하는 방법에 대한 의견교환으로 할애됐다.

임 특사는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문제를 풀지 않으면 위기가 오기 때문에 미국과 대화해야 한다”고 화두를 던졌다. 그 동안 북미간 의제로만 간주돼온 문제에 남한이 공개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임 특사는 2월 한미 정상회담을 상기하며 “세계 패권국 미국의 대통령이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무엇을 주저하느냐”면서 “이대로 버티다간 국제적인 외톨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 특사는 이어 “2003년 북미간 핵 충돌을 막기위해선 북한이 조기 핵사찰을 수용하고 제네바 합의를 지켜야 한다는 게 미국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내년까지 지어주기로 했던 경수로 공사가 미뤄지면서 전력손실이 심각하다”면서 “미국이 먼저 제네바 합의를 깬 것”이라고 반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은 경수로 건설 지연에 따른 보상 문제를 어떻게 든 집고 넘어가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임 특사는 9ㆍ11 테러 이후 힘으로 밀어붙이는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형성됐다고 설명하면서 “벼랑끝 전술로 버티다간 군사적 충돌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임 특사는 이어 미국이 대화할 의지를 밝힌 만큼 김 위원장도 언질을 주는 게 마땅하다고 다그쳤다.

김 위원장은 임 특사의 설명을 끝까지 사려 깊게 경청한 뒤 “김 대통령과 임 특사의 생각이 옳다”면서 “다만 미국이 우리를 적대시하는 비방을 자제해줬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그러나 “우리도 대화를 거부한 적이 없지 않느냐”면서 “좋다. 미국과 대화하겠다”고 결론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은 한술 더 떠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곧 방북하고 잭 프리처드 미 대북교섭 담당 대사의 방북도 수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납치자 문제로 고전 중인 대일관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납치를 한 적이 없다”고 강조한 뒤 “행방불명자 문제라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며 대화 재개를 선뜻 약속했다.


국제정세 인식접근, 남북현안 일사천리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 차이가 좁혀지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고 일사천리로 남북현안들이 합의됐다.

“미국 주도의 국제정세를 유리하게 이끌려면 먼저 남북관계를 개선해 평화메시지를 세계에 보여줘야 한다”면서 “그래야 인도적 차원에서 비료와 식량을 줄 여건이 된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임 특사의 설명에 김 위원장은 “북남문제는 6ㆍ15 정신에 맞게 모든 것을 원상회복하자”고 화답한 뒤 “남측의 지원이 요망된다”고 솔직히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4차 이산가족 상봉을 아리랑 공연 시작 전에 금강산에서 열고, 비료ㆍ식량 지원 문제를 다룰 2차 경협추진위도 5월초에 서울에서 갖기로 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지난해 11월 6차 장관급 회담에서 남북이 합의한 사안이었다. 여기에 김 위원장은 2000년 9월 박재규 전 장관에게 약속한 경제시찰단 파견을 약속했고, 금강산 관광활성화를 위한 2차 당국회담도 6월초에 열자고 했다. 임 특사가 부산 아시안 게임의 참가를 요청한데 대해서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나 임 특사가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을 제의한 데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사정이 있다”면서 회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산가족 교환이 미칠 체제 부담을 염두에 둔 것이다.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국방장관회담 등도 원칙적인 합의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동해선 연결 깜짝 카드

임 특사가 경의선 문제를 꺼내자 김 위원장은 동해선 연결사업을 제안, 좌중을 놀라게 했다.

김 위원장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의 연결을 추진 중인 러시아측 요청이 있었다고 부연 설명한 뒤 남측의 호응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경의선 문제는 합의를 재확인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고, 동해선이 새로 합의됐다. 김 위원장이 동해선 카드를 꺼낸 데는 서쪽 지역보다 체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판단과 금강산 관광대가를 받아내겠다는 복안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공동보도문에 언급된 대부분의 합의사안을 즉석에서 결론짓고 시행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흡족했다. 김 위원장은 자존심을 세우면서 북미대화 재개의 명분을 챙겼고, 남측의 지원을 얻어냈다. 임 특사는 극도로 험악해진 국제정세 속에서 남북대화를 복원했다. 술잔이 수없이 돌았다. 남측이 준비해온 포도주와 김 위원장이 즐기는 보드카, 들쭉술에 기분 좋게 취했다.

이동준 기자 djlee@hk.co.kr

입력시간 2002/04/0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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