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1만명 시대] 변호사 1만명 시대…무한경쟁 돌입


사시 합격은 또다른 경쟁의 시작, 대형화·전문화로 생존전략

‘변호사 1만 명 시대’를 향해 달려가는 일산의 밤은 뜨거운 봄 열기로 가득하다.

경기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에 위치한 사법연수원. 지난해 말 서울 서초동 시대를 마감하고 21세기 법조인 양성의 새로운 터전으로 자리잡은 일산 연수원은 4월에 접어들면서 밤에도 도서관은 물론 기숙사 방 마다 불빛이 꺼지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있다.

“개업 변호사 5,000명 시대는 이젠 옛말입니다. 저희가 졸업할 때면 법률시장 개방과 더불어 ‘변호사 1만 명 시대’를 맞게 됩니다.

서초동 법조타운의 웬만한 선배 변호사도 송무 수임료 만으로는 사무실 임대료 조차 메우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시 패스’라는 딱지가 오히려 삶을 옥죄는 향후 고민거리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변호사 사회도 이젠 바야흐로 무한경쟁 시대입니다.”(사법고시 43회이며 연수원 33기인 김 모씨)

3월 초 사법연수원 새 식구가 된 연수원 33기 ‘루키’로 일산 연수원 개원 원년(元年)생인 박 모(25)씨는 집이 연수원에서 10분 거리인 주엽동이지만 지난달 초 한 평 안팎의 기숙사 방에 짐을 풀었다.

고시원 생활에 진력이 났을 법도 하지만 집을 오가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 법전을 한 줄이라도 더 읽기 위해 기숙사를 선택했다. 부친의 뒤를 이어 판사가 되는 것이 꿈인 박씨는 사시 합격의 기쁨도 잠시, 연수원 입소와 동시에 992명의 동기생들과 다시 치열한 경쟁에 돌입하는 또 다른 고시원 생활을 맞고 있다.

올 초 사법 연수원을 수료한 31기 연수원생 712명 중 판사와 검사로 임용된 규모는 204명(판사 115명, 검사 89명)이다. 등위 하한선은 약 350등 선이지만 연수원 수료 후 동기생들(법무관 제외) 중 3분의 2 정도는 변호사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 중 처음부터 변호사가 되려는 수료생들을 제외하면 철저한 계량화의 잣대로 솎아내는 것이 법조계의 냉혹한 현실이다.

올해 처음 개설한 서울 강남의 한 법무대학원이 사시 합격자들을 위해 마련한 사법연수원 준비 특별과정에 100여명이 등록하는가 하면 연수원 준비를 위한 특별과외가 성행하는 것도 ‘PG(졸업 후)시대’를 염두에 둔 불꽃 튀는 생존 경쟁 때문이다.

임용이나 취업을 앞둔 2년차 연수원생들의 심리적 부담은 한층 클 수 밖에 없다.

판ㆍ검ㆍ변호사 실무수습 과정을 각각 2개월씩 밟고 있는 연수원 32기 정모(34)씨는 “이제 변호사 자격증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시대는 끝났다”며 “판ㆍ검사 임용은 물론 대형 로펌의 취업 관문을 통과하는데 연수원 졸업 성적이 결정적 잣대가 된다”고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사법연수원에 부는 변호사 준비과정 열풍

사법연수원내에서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은 ‘변호사 1만 명 시대’를 앞둔 현실에 대한 의식 전환으로부터 시작된다. 판결문 작성 방법에만 몰두하던 연수원생들의 가방에는 하버드 비즈니즈 간행물 등 영문 경영서적이 법전과 함께 꼽혀 있을 정도다. 일관성만을 요구해온 연수원에도 다양성과 전문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환란 직전인 1997년 6월, 5년간 몸담았던 은행을 박차고 나와 고시공부에 매달려온 김 모(35)씨는 연수원 자율 단체인 ‘변호사를 준비하는 모임(변준모)’의 33기 간사다.

서울 봉천동에 사는 그는 오전 9시 자율학습으로 시작해 오후 5시 30분까지 이어지는 수업을 듣기위해 아침 6시30분이면 집을 나선다. 자가운전자인 김씨는 차내에서도 영어회화 테이프를 듣고 따라 하며 빡빡하게 잡혀있는 하루일과에 대한 생각으로 봄 기운을 느낄 여가도 없다.

오전 7시30분부터 김씨에겐 법전 공부와는 별개의 수업이 시작된다. 월ㆍ수ㆍ금요일은 동기연수생들과 영어 회화를, 화ㆍ목ㆍ토는 금융거래법에 대한 스터디 그룹에 참석한다.

“판사나 검사 보다는 연수원 수료 후 금융 업종에 관심있는 동기 서 너 명과 함께 금융거래법 전문 소형 로펌을 차리거나 은행권내 ‘인하우스 로이어(in-house lawyer: 기업내 고문변호사)’로 일하고 싶다”고 대뜸 말하는 김씨는 이미 졸업 후 진로를 결정했다.

김씨와 같이 자신의 향후계획을 뚜렷하게 세운 연수생 10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 모임이 바로 ‘변준모’다. 이들은 판사와 검사 교육 위주로 짜여진 연수원 정규 교육과정에서 배울 수 없는 자신들의 특정 관심분야에 대한 전문ㆍ실무 교육을 접목시키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수업이 끝나는 오후 5시30분, 김씨는 저녁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밤 7시부터 기업변호사를 초빙해 강의를 듣는 기업분쟁사례 연구회에 참석한다. 선배와 동기 등 20여명과 열띤 토론을 벌이며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른다.

이같이 연수원내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학회와 스터디그룹은 연수생 100여명이 참석하는 국제통상ㆍ거래법 학회와 노동법 학회, 환경법 학회 등 10여 개에 달할 정도다. ‘파김치’가 돼 집에 돌아오는 김씨는 영락없이 다시 책상에 앉아 새벽 2시가 넘게까지 법전 속에 파묻힌다.


소형 부티크 로펌, 서비스정신으로 재무장

지난해 700명 선이던 사법연수원 수료생수는 33기인 김씨의 동기생들이 사회로 진출하는 2004년에는 40% 급증한 1,000명 선에 달한다.

연간 1,000명의 변호사가 배출되고 현재 수백명의 외국 변호사들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법률 시장이 개방돼 외국 로펌들이 국내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2005년이면 ‘변호사 1만 명 시대’가 현실로 성큼 다가온다.

4월 8일 현재 대한변호사협회에 등록된 개인 변호사는 5,032명에 이른다. 또 법무법인 수는 218개로 1996년 94개에서 2.3배 이상 늘었다.

최근 이같이 변호사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면서 개인사무실을 운영하던 현직 변호사들은 규모가 큰 로펌으로 흡수되거나 연수원 수료자들은 그룹을 이뤄 소형 ‘부티크 로펌’(전문화 로펌)을 만드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이는 변호사들이 사건수임 감소로 개인의 단독 사무실 유지가 힘들면서 경비절약의 차원은 물론 저작권과 국제소송, 엔터테인먼트 등 특정분야를 표방하며 소형 로펌이지만 자기들만의 전문화된 영역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하창우 변협 이사는 “법원 근처에서 송무만 다루던 변호사들까지도 아파트 상가지역으로 나서 주민들의 분쟁을 조정하는 가 하면 중소기업내 자문 변호사직을 맡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연수원 31기 출신의 이홍주 변호사(38) 등 동기 3명이 의기투합해 서초동 법원 정문 앞에 세운 법률사무소 ‘사람과 법’은 유명 사이트인 아이러브스쿨의 대주주였던 금양 등 중견ㆍ중소 기업들의 법률 고문을 맡고 있다.

연수원 당시 변준모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던 이 변호사는 사회 초년생 변호사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 남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중견ㆍ중소기업 법률서비스로 영업타깃을 특화 시켰다.

이 변호사는 “우리는 중견ㆍ중소 기업 고객들을 ‘친구 회사’라고 부른다”며 “친구처럼 고객과 밀착된 서비스를 제공해 올해 중 20개의 중소기업과 고문계약을 맺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중견 로펌인 법무법인 두우는 국내 최초로 연예ㆍ문화 등 엔터테인먼트 사건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청담사무소’를 지난달 초 개설했다.

최근 TV 연속극 프로인 ‘여우와 솜사탕’ 표절사건 소송을 맡는 등 문화방송국의 자문변호사인 최정환 변호사(41)는 “‘1만 명 변호사 시대’를 앞두고 부티크 로펌(전문 로펌)들의 사업개발 가능성은 무한정”이라며 “엔터테인먼트 부문만 해도 영화와 음반 등 5개 분야로, 또 스포츠 마케팅, 미술작품, 공연 등도 각광 받는 전문 사업분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화를 내세운 부티크 사업에도 명암이 교차한다.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부동산 경매컨설팅 사업에 초점을 맞춰 출발한 한 법무법인의 경우, 부동산 경기가 신규 분양권 시장으로 옮겨가고 경매과정에 필요한 인원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1년도 채 버티지 못한 채 사업을 정리해야 했다.

또 벤처 열기가 급랭하면서 사업전략을 벤처 기업으로만 특화한 일부 로펌들은 사업을 접고 다른 새 영역을 찾아가는 사례도 빈번하다. 반면 의학ㆍ금융 분야 등은 부티크 로펌들의 전문분야로 이미 자리잡고 있다.


개방에 대비한 대형화가 바람직

소형 로펌들의 전문화 추세 속에 기존 메이저급 법무법인들의 대형화 열풍은 한층 거세다. 지난해 여름 변호사 수 기준으로 업계 4위인 국제거래법 전문의 법무법인 한미와 합병, 단번에 2위로 부상한 송무 전문 법무법인 광장(합병전 6위권)은 최근 ‘규모의 경제’ 효과를 실감하고 있다.

로펌 업계에서 법무법인 간의 성공적인 합병 벤치마킹 대상이기도 한 광장은 합병 후 소송 수임 건수가 두 법인이 이전에 각각 맡았던 소송건수를 합한 것보다 배 이상 증가했다.

김재훈 광장 변호사(45)는 “일반적으로 수 천억원이 걸린 대형 거래의 경우 전적으로 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 변호사수는 30명 정도에 이른다”며 “대기업들이 법률자문이나 소송을 의뢰할 때 변호사 개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로펌의 규모를 우선적으로 물어온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은 올해 백창훈 전 사법연수원 교수 등 16명의 변호사를 새로 채용, 변호사 수를 222명으로 늘렸다. 태평양은 김영철 전 법무연수원장 등 14명을 뽑아 소속 변호사 수가 115명으로 , 광장도 10여명을 늘려 137명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

지난해 1월 열린합동법률사무소와 합병한 세종은 새로 10명을 영입, 변호사 100명을 넘어섰다. 법무법인 충정도 올해 13명의 변호사를 선발하는 등 5~10위 권의 중형 로펌들까지도 외형 늘리기에 주력하고 있다.

장수길 김&장 대표변호사는 “로펌 업계가 전반적으로 대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어 향후 중소형 로펌간의 합병 논의는 뜨거운 쟁점이 될 것”이라며 “그러나 합병 부작용을 고려할 경우 자체 인원 보강을 통한 점진적인 대형화가 바람직한 방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내 법무시장은 우리 스스로가 개방하지 않아도 세계무역기구(WTO) 도하 라운드 협상에 따라 늦어도 2006년까지는 모든 빗장을 열어줘야 하는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변호사 1만 명 시대’는 국내환경의 변화뿐 아니라 치열한 외적인 도전에 직면한 대 격변의 소용돌이를 예고하고 있다.

장학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4/09 16:09


장학만 주간한국부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