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세상] 속 시원한 '한 마디'를 위해

"한화갑이 당권 출마 오늘 한다는데." "이회창은 내일 총재직 사퇴하나?" "박근혜는 영국 갔어? 언제 가나?" "김덕룡 경선 나간데, 안 나간데?" "내일 총파업 있지?" "아침 7시면 파업 참여율 같은 것 아직 안 나올걸?"

오전 10시. ‘안녕하십니까? 정관용입니다’에 오를 내일의 '반찬거리'를 정하기 위한 회의가 시작된다. 담당 차장과 PD 3명, 작가 2명, 그리고 MC까지 7명이 머리를 맞댄다.

얼핏 들으면 중구난방, 봇물 터진 듯 말이 쏟아져 나온다. 이 자리에선 사람 이름 뒤에 직함이나 존칭을 붙이는 법이 없다. 때로는 '화갑이형', '근혜누나' 같은 표현도 등장한다. 상소리도 심심치 않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용가리 같은 놈'이 이 자리에선 최대의 욕이다.

회의는 계속된다. "박승이 한은총재 언제 취임하나?" "임동원 북한 가는 게 3일인데." "그 '형님' 절대 안 나와. 전화 거나 마나야." "아침 화제로는 안성기 어때? 일본 무슨 영화제 심사위원 됐다던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에서 벌어지는 그날의 굵직한 일들과 내일 있을 일들이 이 자리에서 한꺼번에 걸러진다. 기준은 단 하나.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가? 청취자들의 관심이 집중될 사안이 무엇인가? 누가 핵심인물인가? 어떤 말을 들어야 하나?

"이 정도 하지." 회의시간은 채 20분을 넘기지 않는다.

이제 PD와 전화통 사이, 작가와 컴퓨터 사이의 전쟁이 시작된다. PD는 연사 섭외에 들어간다. 단 '한방' 전화에 섭외가 되는 경우도 있다. 대단한 행운이다.

대부분 한 명 섭외에 수십 차례 전화를 걸어야 하고, 꼭 그 사람이 나와 줘야 하는데, 한사코 안 나오겠다고 해서 아이템 자체를 포기해야 할 때도 많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전화는 안 되고, 아이템을 바꿔야 하나, 조금 더 기다려 볼까, 긴장의 연속이다.

작가들은 컴퓨터에 매달린다. 관련 기사를 찾고, 무엇이 쟁점인지 정리하고, 그래서 내일 방송에서 어떤 말을 끌어내야 할지 머리를 싸맨다.

MC인 내가 가장 미안한 대목이다. 하지만 나도 '거저 먹는' 건 아니다. 오후 3시, 4시, 시시때때로 담당 차장과 전화통화를 한다. "000이 안 나온다는데, 아이템 하나가 빵꾸야." "재미 삼아 000은 어때요?" "내가 친한데 직접 전화해 볼까?" 내일 아침 '반찬거리'가 모두 차려질 때까지 하루 종일 이 '짓'이 되풀이된다.

아직 동트기도 전인 아침 6시. 방송국 5층 라디오정보센터 사무실에 도착해 보면 벌써 PD와 작가들이 부산을 떨고 있다. 뜨거운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전략구상에 들어간다. 어떤 질문을 먼저 할까?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생각할 겨를도 없다. 6시 25분, 방송 시작 5분전 스튜디오에 들어선다. 억지로 가래침을 뱉어 목을 가다듬고 진짜 전투에 돌입한다. 시그널 뮤직과 함께 생방송 큐 싸인. "안녕하십니까? 정관용입니다."

아침 6시30분부터 8시까지 매일 아침 전투가 치러지고, 이 전투를 위한 전쟁은 하루 종일 계속된다. 목적은 단 하나 아침을 시작하는 전국의 청취자들에게 오늘 하루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

판단은 우리 몫이 아니다.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시골 장터의 아낙네든 뉴스가 되는 인물들이 직접 그의 목소리로 세상을 이야기하게 한다. 중요한 뉴스와 중요한 인물을 찾아내는 게 우리 팀의 역할이고, 생방송 중 가급적 정확한 이야기를 많이 끌어내는 것까지가 나의 역할이다. 나머지는 청취자의 고유권한이다. 판단은 국민이 내린다.

좀 더 솔직해져 볼까? '오늘 하루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 이건 건방진 욕심이다. "뭐 그 따위로 방송하느냐"는 욕이나 안 먹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세상살이로 지치고 힘든 청취자들께 아침마다 짜증 하나 보태는 일이나 안 했으면 좋겠다.

경쾌한 음악방송 다 놔두고 딱딱한 시사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리는 분들께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잠깐이나마 가슴 시원해지는 말 몇 마디라도 들으실 수 있도록 해야 할 텐데...

정관용 시사평론가, KBS 1R ‘안녕하십니까? 정관용입니다’ 진행자

입력시간 2002/04/1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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