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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의 문화읽기] 풍자와 패러디에 담긴 통쾌함

[김동식의 문화읽기] 풍자와 패러디에 담긴 통쾌함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1 교시 강의에 늦지 않기 위해 S대 전철역 근처의 택시 승강장에서 줄을 섰다. 택시가 많을 시간이라 조금만 기다리면 차례가 오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기다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지를 않는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관청에서 나온 분과 모범기사라는 완장을 두른 분들이 교통 캠페인을 하고 있었다. 택시가 오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모범기사 완장을 두른 분들이 자신들의 택시를 가지고 나왔고, 쉬는 차라는 딱지를 붙인 개인택시들이 택시 승강장을 자신들의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풍경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떤 사람은 초점이 안 맞는지 4차선 차도를 횡단해서 중앙선 위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택시 기다리는 학생들은 수업에 늦을까 봐 가슴을 조리는데 캠페인에 참여한 사람들은 온화한 미소와 적당한 포즈를 취하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교통질서를 지킵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캠페인일까. 놀랍게도 그 커다란 사거리에서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교통 캠페인을 주관하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관료적인 전시행정)과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힘(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시민들)을 동시에 보는 듯했다.

어쩌다 겪을 수도 있는 개인적인 불편을 과장하거나 일반화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운이 나쁘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게 택시가 아니겠는가.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교통질서를 지키라면서 정작 자신들은 교통질서를 어기고 있는 역설적인 풍경이다.

단순한 짜증을 넘어 분노에 가까운 불쾌함을 느꼈던 것은, 그 역설적 풍경 너머로 권력의 비곗살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작 해야 할 일은 안 하면서 엉뚱한 곳에다가 쓸데없이 참견이나 하는 모습이, 우리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권력의 초상이라는 생각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엽기적인 풍경과 맞닥뜨린 탓이었을까. 최근 인터넷에서 유행하고 있고 음성파일이 떠올랐다. 대통령의 말투를 흉내낸 개그인데,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여, 어, 조지 부쉬’라는 인사말로 시작해서 전투기 선정 문제로 점점 감정이 격해지더니, 자신을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전설적인 킬러 카이저 소세라고 우기다가 끝내는 ‘××놈’ ‘×새끼’등과 같은 과격한 욕설로 끝을 맺는다.

생생한 욕설이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에 속이 후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욕설을 통해서 응어리진 그 무엇을 풀어내는 카타르시스(감정의 배설 및 정화)를 느끼는 것이리라. 개인적으로는 라디오 방송을 패러디 하는 방식으로 협찬사를 밝히는 대목이 압권이었다. 방송 중간에 삽입된 멘트는 다음과 같다.

“레츠뮤직 협찬,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이 소리는 우리나라 모 대통령이 F15 문제로 미국의 모 대통령에게 했으면 하는 소리입니다.”

더욱 인상적인 대목은 마지막 멘트이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혹시나 하는 사람들 협찬입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그 동안 웃지 않고 버티던 사람들도 그만 뒤집어지고 만다. 이 파일이 네티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표면에 드러나 있는 반미(反美)감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풍자와 패러디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책임 있는 계층의 미심쩍은 ‘침묵’이다.

국무회의에서 담배의 해악에 대한 강도 높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는 뉴스는 접할 수 있지만, 정작 국민의 혈세가 소중하게 사용되어야 할 국방사업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들을 가지고 있는지 국민들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침묵이 암시하는 바를 불길한 전조로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개그가 내포하고 있는 물음은 단순하면서도 위협적이다. ‘식민지에 가까운 종속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과연 침묵이 가능한가’라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그에 등장하는 욕설은 문화적 저급함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우리시대의 가장 아픈 부분을 드러내는 또 다른 표현이라 할 것이다. 문화란 살면서 느끼는 감정의 표현이다. 일반대중의 삶 속에서 피어오르는, 울음 섞인 풍자가 없다면 이 시대의 문화는 얼마나 갑갑한 것일까.

풍자와 패러디의 외피를 빌려서라도 할 말은 하고 마는 힘이 문화의 저층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각별하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tan@empal.com

입력시간 2002/04/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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