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채플린, 거장의 생애와 예술

■채플린
(데이비드 로빈슨 지음/한길아트 펴냄)

“그는 방랑자이면서 외로운 귀족이었으며 예언가이자 사제였고 시인이었다.” 동시대의 영화인 페데리코 펠리니의 말이다. 그러나 저 찬사도 미국 코미디언 밥 호프의 간결한 추모사에 깃든 흠모의 정에는 못 미친다.

“우리가 그의 시대에 살았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미국 영화계가 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오랜 동안 채플린을 거부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호프의 말은 감동적인 속죄라 할 법하다.

‘거장의 생애와 예술-채플린’는 그의 삶과 예술, 그리고 시대를 함께 돌이켜 볼 수 있는 미시적인 동시에 거시적인 전기다. 채플린이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녹여 내는 데는 1,03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이 필요했다.

1889년~1977년, 채플린이 호흡했던 지상의 시간 88년은 1964년 채플린이 남겼던 500여쪽의 자서전에 근거한 것이기에 그의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

채플린의 데뷔 공연은 빅토리아 여왕 즉위 50주년 기념식 축제가 한창이던 1887년 6월 런던의 폴리 버라이어티 극장 무대였다. 처음 흉내내기 배우로 출발했던 그는 머잖아 ‘연극과 묘사를 하는 가수’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난봉꾼이나 건달이 아니면 꽥꽥대는 갓난애 때문에 미치기 직전인 보통 남자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연민 섞인 폭소를 제공했다.

어머니의 불륜, 이복 형제와의 갈등 등 우울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그의 코미디는 웬지 모르게 안타깝고도 서글프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바삐 돌아가는 무대 인생의 와중에도 어머니에게 문안 편지를 띄우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전 건강하답니다. 어머니의 다리도 많이 나았는지 모르겠네요. 뭘 하시든 몸을 좀 돌보세요.’

그러나 발돋움하는 그에게는 역경도 따랐다. 1907년 서커스 순회 공연단의 일원으로 가졌던 무대는 그에게 야유와 오렌지 껍질 세례만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무대라는 장소가 한치의 실수도 용납 않는 치열한 격전장이라는 사실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채플린의 삶, 나아가서는 우리 시대의 풍경을 바꾼 계기가 바로 그의 영화 출연이다. 1913년 11월부터 주급 1달러에 1년 동안 영화에서 배역을 맡을 배우로 고용한다는 계약서였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된 떠돌이 의상 차림도 이 무렵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 1년 뒤 분장실에서 눈에 띄는 대로 주섬주섬 챙겨 입고 보니, 작은 모자와 큰 구두, 헐렁한 바지와 꼭 끼는 저고리 등 절묘한 불균형의 미학이 창출된 것이다. 한 다리를 수평으로 뻗은 채 다른 한 다리를 축으로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달아나는 기술 역시 이 무렵 굳어진 것이다.

채플린은 배우로서만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영화와 연을 맺었다. 1914년 ‘폭소 가스’ 등 6편의 작품을 감독, 영화와의 연을 맺은 그는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에 빨려 들어갔다. 대성공이었다. 그는 머잖아 영화계의 타고난 코미디언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웃음을 쏘아 대는 기관총’이기를 거부했다. ‘작업’, ‘행복’ 등 자본주의적 노동 착취 현상을 비꼰 영화들은 괴기스러운 공포 코미디라는 평을, ‘인생’, ‘경찰’ 등은 삶의 비극성을 통찰한 슬픈 코미디라는 평을 따냈다. 직업소개소에서 몇 안 되는 일자리를 놓고 그가 다투는 모습을 희화한 ‘개의 생애’(1918년)는 가진 자에 대한 분노를 희극적으로 표출했다.

그는 웃기는 자가 아니라, 세상의 모순을 웃음으로 치유하는 자였다. 죽 끓 듯한 변덕, 타인에 대한 불관용 등 그의 인간적 약점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서술 태도는 이 책이 결국 채플린에 대한 방대한 평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2/04/1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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