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보·혁을 아느냐] 색깔에 일그러진 한국정치

남북대치 상황을 독재와 권력 유지 도구로 악용

국내 정치사에서 보ㆍ혁(保革) 대결 같은 이념논쟁이나 색깔논쟁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대통령 선거전에선 더욱 그렇다.

한국 전쟁의 참상을 체험하고, 남북 분단의 대치 상황에서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좌파니 색깔론자니 하는 분류는 소위 ‘빨갱이나 공산주의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그 파괴력이 엄청났다.

‘레드 콤플렉스’에 빠진 일부 정치인들은 선거 때면 상대 후보를 죽이기 위해 색깔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댔다. 4차례의 도전 끝에 뜻을 이룬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색깔론의 대표적인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이다.


전가의 보도 앞에 당할 자 없었다

정치권에서 보ㆍ혁 대결이 마녀사냥식의 색깔 논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때는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직후인 당시 죽산(竹山) 조봉암(1898~1959년) 진보당 후보는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 측이 제기한 색깔론에 밀려 분루를 삼켜야 했다.

일본서 항일 투쟁을 해온 죽산은 조선공산당 간부를 맡았던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그러나 해방 직후인 1946년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에게 충고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 우익 진영으로 전향해 제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대선에서 죽암은 이승만 후보 측의 색깔론 공격에 휘말려 낙선했다.

당시 대선은 자유당의 이승만과 민주당의 신익희 간의 대결구도였다. 그러나 신익희 후보가 유세를 가던 중 열차에서 뇌일혈로 급사하면서 조봉암 후보가 이승만의 라이벌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이승만 후보를 비롯한 자유당 측이 조 후보의 좌익 전력을 공격하고, 야당인 민주당 마저 ‘빨갱이인 조봉암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혀 조 후보는 200만표를 얻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2위에 머물렀다.

죽암은 결국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최근 학계에서는 죽암에 대한 재평가 논쟁이 일고 있다.

유신과 반공(反共)을 기치로 내세웠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대통령 선거에서 색깔론에 휘말려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직후인 1961년 반공 논리를 앞세워 당시 혁신계 언론사였던 ‘민족일보’를 반국가ㆍ반혁명적이라며 창간 3개월 만에 종간시키고 조용수 사장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반공의 보루를 자처했던 박 전대통령 자신도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전에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홍역을 치려야 했다.


이승만 정권 이후 단골메뉴로 등장

당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박빙의 대결을 벌이던 민정당 대선 후보 윤보선 후보 측은 선거일 20일을 앞두고 “집권 여당의 후보인 박정희는 국방경비대 시절 좌익에 관련 했었다”며 “박정희는 여순 반란사건 때 군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 등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색깔론을 제기했다. 박 전대통령은 당시 이런 윤 후보측의 사상 논쟁 제기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상대 후보의 색깔론에 시달렸던 박정희 후보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때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색깔론으로 공격하는 반대 입장에 선다.

박정희 후보는 자신이 당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당시 개혁ㆍ진보적 성향의 김대중 신민당 후보에 역공을 가했다.

1970년대 초에 제기된 사상 문제는 그 이후 건 30년 동안 정치인 김대중의 발목을 잡았다. 김 대통령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측이, 1992년 제14대 대선 때는 김영삼 민자당 후보측이 제기한 용공, 색깔론 시비에 휘말려 분루를 삼켜야 했다. 김 대통령은 1997년 제15대 대선 때 ‘보수의 원조’인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으며 그간의 좌파적 이미지에서 탈피, 대권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4/17 11:11


송영웅 주간한국부